[최민우의 시시각각]'박종철 사건' 은폐보다 더하지 않나
정권 차원의 조직적 은폐도 뒤따라
'6월 항쟁'의 숭고한 의미 부정하나
1987년 박종철 고문 치사(致死) 사건의 은폐성을 상징하는 발언은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죽었다)"였다. 그해 1월 16일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기자회견에서 나왔다. 사건 발생 이틀 만에, 언론 보도 하루 만에 경찰 수뇌부가 허겁지겁 연 기자회견이었지만, 이 발언으로 여론은 더욱 들끓었다. 결국 사흘 뒤 경찰은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의 고문 사실을 인정하면서 관련 경찰관 2명을 구속했다. 그러다 그해 5월 고문 가담 경관이 3명 더 있는 등 경찰이 사건을 조직적으로 조작·은폐하려 했다는 점이 드러나자 국민적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6월 항쟁의 시발점이었다.
새삼스레 35년 전 일을 꺼내는 건 최근 감사원 조사와 검찰 수사 등으로 사건의 면모가 하나씩 드러나고 있는 '서해 피격 사건' 때문이다. 두 사건은 남한과 북한이라는 주체만 다를 뿐 개인의 생명을 국가 권력이 잔인하게 짓밟았다는 점에선 유사하다. 오히려 죽음 이후 사건을 축소·은폐하는 과정에선 '서해 피격'이 더 치밀하고 비열했다.
①국가기관 총동원=1987년 당시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은 집요했다. 고문사가 아닌 쇼크사로 위장하기 위해 병원행을 고집했고, 담당 의사와 부검의 등을 감시하거나 위협했다. 고문 경관 2명을 경찰서로 이송할 때는 똑같은 점퍼를 입은 경찰관 10명을 호송차에 태워 얼굴을 가려주는 동료애(?)도 과시했다. 관계장관 대책회의 등으로 안기부가 배후에 있었지만, 은폐의 핵심은 경찰 조직이었다.
반면에 '서해 피격 사건'에서 은폐를 주도한 건 권력의 최상부 청와대였다. 고(故) 이대준씨가 북한군에 사살돼 시신이 소각된 건 2020년 9월 22일 밤 9시 40분쯤. 부랴부랴 3시간 뒤 새벽 1시 청와대에서 서훈 안보실장이 주재하는 대책회의가 열렸고, 회의 직후 국방부와 국정원은 관련 첩보 106건을 삭제했다. 해경은 이씨를 실종 상태로 위장하기 위해 수색작업을 이어갔다. 국방부가 북한군에 의한 시신 소각을 발표하자 문재인 대통령은 "너무 단정적"(27일)이라고 질타했고, 이후 정부 입장은 180도 달라졌다.
②사자(死者) 명예훼손=87년 당시 경찰은 박종철군의 시신을 검사 지휘 없이 이송했고, 부검 뒤 서둘러 화장했다. 명백한 증거 인멸이었다. 박종철 사건 이후 전두환 정권은 국민적 저항이 커질 때마다 "용공 세력에 의한 국가 전복 우려"를 강조했다.
'서해 피격 사건'에서 언론에 먼저 노출된 건 이씨의 시신 소각보다 "스스로 월북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정황 보도였다. 월북은 곧 반역을 의미한다. '월북했다면 죽어도 어쩔 수 없잖아'라는 정서를 부추기려는 계산된 플레이였다. 이후 국방부는 ▶구명조끼 착용 ▶사각 지역서 슬리퍼 발견 ▶발견 당시 소형 부유물 의지 ▶월북 의사 표명 등을 증거로 제시했다. "가정불화" "도박 빚 시달려" "정신적 공황 상태" 등 확인되지 않은 이씨 사생활도 유포됐다. 모두 계획된 시나리오였다.
③권력의 뻔뻔함=박종철 사건 다음달, 전두환 정권은 내무부 장관과 치안본부장을 경질하며 문책 시늉을 했다. 하지만 12·12 사태를 도모한 정호용씨를 내무부 장관에 앉히며 강공 모드를 굽히지 않았다.
'서해 피격'과 관련해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직접 언급한 건 사건 발생 닷새 만이었다. "특별히 김정은 위원장이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뜻을 전한 것을 각별한 의미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가해자의 사과를 수용할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이라면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게 상식이다. 시신도 찾지 못했고, 유족의 양해도 구하지 않았는데 무엇을 받아들인다는 것인가.
문 전 대통령은 감사원 서면 조사 요구에 "무례하다"고 했다. 서훈 전 실장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됐을 때는 "도를 넘지 말라"고 했다. 은폐 혐의가 속속 드러나도 사과할 뜻은 없어 보인다. 6월 항쟁의 후예라던 문재인 정부의 자기 부정에 기가 찰 뿐이다.
최민우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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