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정의 이코노믹스] 사회격차 키우는 교육, 이제는 바꿔야 할 때다
양극화 해소와 교육
부모 경제력이 대학 진학 결정
세계은행 자료에 의하면, 1965~1989년 기간 한국은 세계 각국과 비교했을 때 소득 불평등이 상대적으로 심하지 않은 나라였다. 그런데, 상황이 급변했다. 통계청 보고에 의하면, 우리 사회에서 계층 상향 이동 가능성이 작다는 인식이 1994년엔 11%였는데 2015년 62%로 증가했다.
2017년 한국개발원(KDI)의 ‘사회자본에 대한 교육의 역할과 정책 방향’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중국·일본·미국 대학생 각 1000명, 총 4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한국은 압도적 대다수(81%)가 고등학교를 ‘함께하는 광장’ ‘거래하는 시장’보다 ‘사활을 건 전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부모의 경제력이 명문대 진학에 큰 영향을 준다고 인식하는 한국 대학생의 비율은 85%로 중국(57%), 일본(62%), 미국(74%)보다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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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은 계층이동 사다리’는 옛말
획일적 지식과 디지털 시대 충돌
학력에 대한 패러다임 전환해야
영국도 새 대입방식 논의 본격화
창의·사고력 배양이 교육의 목표
수능형 공부로는 AI에 백전백패
」
무상교육·무상급식·반값등록금 등 교육의 자부담 감소 정책을 꾸준히 시행해 왔음에도 격차가 더 악화하는 이유는 뭘까. 사활을 건 전장처럼 치열한 경쟁 교육을 하고 있음에도 계층 이동에 대한 기대는 낮고 부모 경제력에 의한 대입 의존도가 높다는 인식은, 현재의 교육이 사회 현실에서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교육의 내용과 평가의 패러다임이 확 바뀌어야 함을 시사한다.
자동화·AI시대 대비한 생존역량
식민지 시대와 압축 경제 성장기를 거치면서 우리는 학생 각자의 비판적·창의적 사고를 기르기보다 선진 지식을 무비판적으로 흡수하는 공부에 길들여졌다. 선진국이 만들어놓은 제품과 기술을 빠르게 추격하면 되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경제였기 때문에 생존에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4차산업혁명 물결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자동화와 인공지능(AI) 시대를 대비한 생존 역량이 필수적인 시대가 됐다. 이미 지난 수십 년간 단순 반복 업무가 급격히 사라지고 비반복적 분석이나 대인관계 업무가 증가해 왔다. 4차산업혁명은 이를 가속시킨다.
이제 사회는 ‘무엇을 알고 있는지’보다 ‘알고 있는 지식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중시한다. 그런데도 우리 교육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보다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주로 평가한다. 교육과 사회의 심각한 불일치다. 학생 각자의 비판적·창의적 사고력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정답 맞히기 전력 속도전이 펼쳐지고 있다. 이런 교육의 패러다임이 바뀌지 않으면 학교 상위권조차도 국제무대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어렵다. 사회 양극화 개선이 요원함은 말할 것도 없다. 교육이 바뀌려면 무엇을 학력으로 볼 것인지, 무엇에 고득점을 줄 것인가에 대한 개념부터 달라져야 한다.
국제공인 대입시험(IB) 도입 선언
다행히 올해 교육감 선거에서 새로운 학력에 대한 이슈가 화두였다. 17개 시·도 교육청의 57명 교육감 후보 중 12개 시·도 교육청의 17명 후보가 전 과목 논술·프로젝트 중심의 국제 공인 대입시험 및 교육과정인 국제바칼로레아(IB) 도입을 공약하거나 공개 지지 선언을 했다.
2019년부터 한국어화 계약을 체결하고 IB를 공립학교에 도입하기 시작한 대구교육청·제주교육청에 더해 올해 IB 공약 후보 중 경기·서울·충남·경남 교육감이 추가로 당선됐다. 부산 교육감도 IB 도입을 최근 선언했고, 전남 교육감도 IB TF팀을 꾸렸다. 교육부에서 기초학력 보장을 위해 학력평가 정책을 발표하자 대부분의 교육감이 평가의 필요성엔 공감하면서도 기존 일제고사 방식에는 일제히 반대한 것만 봐도, 기존 시험 체제에서의 고득점을 바람직한 성취로 보지 않는 ‘학력 개념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다음 중 적절한 것은?” “다음 중 시대순에 알맞게 나열한 것은?” 유형의 문제가 아니라 “문학 작품은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추구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학교에서 배운 작품 둘을 중심으로 2시간 동안 쓰시오” “동학혁명은 일본의 조선 병합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는 주장에 대해 얼마나 동의하는지 2시간 동안 논하시오” 같은 문제가 IB 수능 시험이다. 이런 시험은 우리 수학능력시험과 다른 학력을 측정한다. IB가 화두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학력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패러다임 전환이 시작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IB 교육이 학력·경제격차 줄여
이러한 새로운 학력의 IB를 공교육에 도입하는 정책에 대해 각 시·도 의회 및 국정감사장에서 공방이 치열하다. 그런데 같은 IB에 대해 비판 논리가 상이하다. 경기도교육청은 보수 교육감이 추진하려는 IB 교육에 대해 도의회 민주당 의원들이 귀족교육·엘리트 교육이라며 비판하는 반면 제주도교육청은 보수 교육감의 IB 교육 확대 반대 입장에 대해 도의회 민주당 의원들이 오히려 읍면 지역에 IB를 도입했더니 인구가 유입돼 지역 소멸 해소에 기여하고 있는데 왜 반대하느냐고 비판하고 있다. 여기엔 IB교육의 본질에 대한 오해가 있다.
2017년 IB 도입을 최초로 선언한 이석문 당시 제주 교육감은 1%만 받던 IB 교육을 99%에게도 받을 수 있게 하자는 기회 균등의 원리로 한국어 IB 학교를 낙후된 읍면지역에 도입했다. 2011년부터 영어판으로 IB를 운영해 온 경기외고와 다른 모델이다. 현재 IB 도입을 추진하는 교육감도 경기·대구·부산은 보수 성향인 반면 서울·충남·경남·전남은 진보 성향이다. IB 교육은 이미 진영 프레임을 넘어섰다.
미국 시카고가 한 사례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람 임마뉴엘은 시카고 시장(2011~2019년) 시절 일반 학생과 저소득층 학생 간 대입 격차가 20%포인트(66% 대 46%) 차이 났던 것이 IB 교육 이후 3%포인트(82% 대 79%)로 감소하는 연구 결과를 보고 시카고 저소득층 공립학교에 IB 교육을 도입했다. 경제와 교육에서의 격차 해소 전략으로 IB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남이 정해 놓은 정답 좇기가 아니라 자신의 관심과 적성에 맞는 길찾기를 학교 수업의 모든 교과에서 시작해야 하는 이유는 직업 선택 기준의 변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 따르면 우리 학생들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흥미와 적성에 맞는 직업’을 돈이나 안정적인 직장보다 압도적으로 더 중시하고 있었다.
객관식 수능 유지 대입개편은 개악
이제 교육부와 국가교육위원회가 정비되고 2028년 대입 개편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될 것이다. 지난 정부에서 2028년 대입부터 논술형 수능 적용을 검토한다고 발표했지만 여전히 객관식 수능은 존치한 채 논술 문항 일부 추가 수준으로만 설계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현 수능 존치를 전제하는 이 방안은 수업은 바뀌지 않으면서 평가만 추가되는 것이어서 학생은 혼란스럽고 사교육 시장은 폭발할 것이며 시대가 요구하는 역량은 제대로 길러질 수 없다. 개선이 아니라 개악이 될 것이다.
최근 영국 노동당 출신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전 과목 논술로 운영하고 있는 자국의 대입 시험인 에이레벨조차 4차산업혁명 시대를 제대로 대비할 수 없다며 폐지하고 IB를 참고하여 새로운 브리티쉬 바칼로레아 체제를 개발하자고 발표했다. 지금보다 더 지식 콘텐트 이상의 사고력을 평가하는 방향으로 일선 교육을 개혁하자는 제안이다. 보수당 출신의 존 메이저 전 총리도 지지 서명을 했다.
교육의 내용·방법·평가는 사회적 양극화를 완화하기도 하고 심화시키기도 한다. 하나의 기준으로 만든 피라미드 꼭대기를 향해 전 국민이 질주하게 하는 교육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 기존 지식을 무비판적으로 외우는 수용적 공부로는 AI에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다.
학생 각자의 비판적 창의적 사고로 자신만의 피라미드를 만들어 성장할 수 있는 교육이라면, 시대가 요구하는 역량을 타당하게 측정하면서도 채점의 공정성이 보장되는 평가 체제라면, 우리 교육은 학생 각자의 적성을 존중하면서 미래를 창출할 역량을 기를 수 있을 것이며, 격차를 늘리는 교육에서 줄이는 교육으로 방향 전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IB=1968년 스위스에서 개발한 국제 공인 대입 시험 및 교육 프로그램. 국제연합(UN) 주재원 자녀들이 본국의 대입시험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자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논·서술과 프로젝트 기반 정성평가임에도 채점의 공정성을 전 세계 명문대에서 인정받아 현재 160여 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다.
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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