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나, 잘 보내도라”
우리 어머니는 나 말고 차녀 덕수 아우도 교무가 되도록 일천정성을 들여 두 딸 모두를 교무로 만들고 대단히 만족해하셨다.
방학 때마다 어머니 곁으로 오던 딸들이 모든 과정을 마치고 각기 소임에 따라 교당 교무가 된 뒤로는 좀처럼 딸들을 만날 수가 없게 되자 어머니는 아예 고향의 기와집과 농토를 모두 처분하고 원불교 총부가 있는 익산으로 이사하셨다. 그리고 작은 집을 짓고 텃밭을 가꾸며 총부에 오는 딸들을 기다리셨다. 어머니에게는 두 딸이 큰 손님이었다. 딸들이 올 때는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아랫목에 방석까지 깔아 놓으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솜씨껏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딸들이 맛있게 먹는 것으로 큰 재미를 삼으셨다.
나의 첫 소임지는 사직교당이었다. 30대 초반, 개척교당에서 애쓴다고 여기셨던 어머니는 갑자기 “호강하려고 교무 되었느냐? 고생 끝에 낙이 있다. 모든 것을 잘 참고 견뎌내라” 하셨다. 그리고 “공금이 무서운 것이다. 절대로 공금을 함부로 쓰지 마라, 먹고 싶은거나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내가 준 이 돈으로 써라” 하시며 돈이 든 봉투를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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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딸 모두 성직자로 키운 어머니
죽음 앞두고 당부하신 그 한마디
오늘 해가 져도 내일 또 떠오른다
」
5월 스승의 날이 돌아오면 어머니는 매번 예쁜 빛깔의 속바지를 지으시고, 두 딸에게 ‘사직교당 스승에게’ ‘화곡교당 스승에게’라고 써서 하서를 보내주셨다. “스승의 날을 맞아 축하한다. 일체대중을 다 제도하고 이 어미까지도 제도해주기 축수한다”라고 적으셨다. 내 나이 60이 되자 어머니는 갑자기 1000만원의 큰돈을 내밀으셨다. “너는 아들도 없고 딸도 없어서 엄마가 오래전부터 준비한 너의 회갑돈이다” 하셨다. 나는 너무 깜짝 놀라 완강하게 거부하며 그 돈을 절대로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 돈으로 어머니 택시나 타고 다니세요”라고 했다. 내가 너무 완강함을 보시고 그 돈을 도로 챙기셨다. 그러다가 내가 캄보디아 지뢰를 제거하느라 동분서주 애쓸 때 어머니께서 “네가 생명을 살리려고 애쓰니 이 돈을 거기에 보태라” 하셨을 때는 “어머니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어머니는 한평생 우리 자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고 행여 공든 탑이 무너질세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대종사님 성탑을 찾아 기도정성을 바치셨다.
어머니가 자력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요양원으로 가시게 되었다. 잘 계시던 어머니는 갑자기 병환이 나시어 혼수상태에 빠지셨다가 5일 만에야 깨어나셨다. 깨어나신 어머니는 딴 세상에서 오신 분 같았다. 맨 먼저 하신 말씀은 “나 잘 보내도라”였다. 스스로 열반의 시기가 가까워져 오고 있는 것을 예감하신 듯 했다.
나는 구순을 바라보는 어머니께 마음을 가다듬고 “어머니, ‘저 해가 오늘 비록 서천에 진다 할지라도 내일 다시 동천에 솟아오르는 것과 같이 비록 이 생에 죽어간다 할지라도 죽을 때에 떠나는 영식이 다시 이 세상에 새 몸을 받아 나타나게 되나니라’고 한 대종경 천도품 말씀을 믿고 계시죠?” 하자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어머니가 20대에 원불교를 믿기 시작해서 60년보다 더 긴 세월 동안 법회 때마다 법설을 들으신 것은 어머니의 정신적 양식이었다. 어머니는 교당의 설법시간에 들은 대로 어떤 경우에도 죄 받을 일은 짓지 않고 복 받을 일만 가려가며 한평생을 열심히 살아오셨다. 어머니의 다음 생은 그야말로 큰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젊은 날 할머니로부터 무서운 시집살이를 하셨지만 “내가 잘못 짓고 나와서 그러지, 너희 할머니도 남한테는 참 잘하셨다”라고 말씀하셨다. 인과의 이치를 믿으셨기 때문에 금생에 모든 것을 풀고 내생에는 좋은 인연으로 만나기 위해 할머니에게도 잘하려고 애쓴다고 하셨다.
나는 어머니를 간병하면서 독특한 대화법을 생각해냈다. 어머니와 눈을 맞추면서 “우리 엄마 까꿍” 하면 어머니도 나를 바라보며 “우리 딸 까꿍” 하셨다. 어머니는 ‘까꿍’을 참 좋아하셨다. 그래서 자주 까꿍을 했다.
“우리 엄마 까꿍.”
“우리 딸 까꿍.”
어머니와 더할 나위 없이 친밀하고 다정한 대화였다. 나는 어머니 침대 곁에 앉아서 어머니 손을 잡고 책을 읽었다. 젊은 날 일을 많이 하셨을 때의 어머니 손은 거칠었는데, 이제 어머니의 손바닥은 흰떡 절편같이 깨끗하고 부드러웠다.
어머니의 내면세계는 원불교 교법정신으로 저신저골(低身低骨)이 되셨다. 한번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게 마련이지만, 마치 엄동설한이 지나면 새봄이 오듯이 노쇠한 그 몸은 죽어간다 하여도, 가면 다시 오는 거래(去來)의 이치가 있는 줄도 확연히 믿고 계셨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서도 아무 공포가 없고 편안하게 순리로 받아들이며 열반하셨다.
박청수 청수나눔실천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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