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태형의 음악회 가는 길] 대타 지휘자
서울시향의 올해 마지막 정기공연 곡목은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이었다. 오케스트라들의 연말 레퍼토리로 손꼽히는 이 곡을 정작 음악감독 벤스케 지휘로 보기는 힘들었다. 재작년은 코로나로 편성을 축소해 마르쿠스 슈텐츠 지휘로 온라인 생중계했고 지난해에는 입국 후 격리 시간을 못 낸 벤스케 대신 부지휘자 윌슨 응이 지휘했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6일 벤스케가 낙상으로 골절상을 입어 지휘할 수 없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부랴부랴 대타 지휘자를 물색했지만 공연 1주일 전이란 촉박한 일정에 비자 문제까지 난항이었다. 결국 7일 연락이 닿은 김선욱(34)은 출국차 공항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고민 끝에 차를 돌린 김선욱은 초집중 상태로 포디움에 올라 14, 15, 16일 세 차례의 ‘합창’ 공연을 이끌었다. 연주의 호불호는 갈렸지만 무사히 지휘를 끝냈다.
홈런을 칠 수도 삼진을 당할 수도 있는 ‘대타’란 말에는 불확실성의 묘미가 있다. 김선욱 이전에도 올해 대타로 섰던 지휘자들이 기억에 남는다. 지난 5월에는 필립 조르당을 대신해 장한나(39)가 빈 심포니 내한공연을 이끌었다. 11월 말에는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음악감독 다니엘 바렌보임을 대신해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내한공연을 지휘했다.
젊은 시절, 대타의 기회를 놓치지 않은 지휘 거장의 이야기도 떠오른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19세 때인 1886년 오케스트라 첼로 단원이었다. 브라질에서 오페라 ‘아이다’를 공연할 때 객원지휘자가 실력 미달로 중도에 퇴진했다. 평소 지휘에 열정이 있다고 소문난 토스카니니에게 기회가 왔다. 그는 오페라 전막을 암보로 지휘하며 데뷔했다.
1943년 뉴욕 필 부지휘자였던 25세의 레너드 번스타인은 오전 9시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다. 그날 객원지휘자였던 브루노 발터가 위염에 감기가 겹쳐 무대에 설 수 없으니 대신 지휘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번스타인은 리허설 한 번 없이 슈만·로자·슈트라우스·바그너의 곡들을 지휘했고, 이는 전국에 생중계됐다. 객석에선 기립박수가 터져나왔다. 20대 지휘자의 극적인 뉴욕 필 지휘 데뷔는 미국의 성공 스토리로 회자했다.
김선욱은 베토벤 ‘합창’ 실제 연주를 초등학교 5학년 때 정명훈의 지휘로 처음 접했다. 23년 뒤 그 곡으로 서울시향을 지휘하게 될 줄 알았을까. 이번에 지휘를 수락한 이유를 그는 “베토벤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을 완주했던 김선욱은 교향곡과 피아노 소나타, 현악 4중주가 서로 연결돼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짧은 시간 동안 집중해 암보로 지휘해냈다. 어떤 지휘자에게나 처음은 있다. 운도 많이 작용한다. 그러나 불현듯 찾아오는 대타의 기회는 준비된 지휘자가 잡지 않을까.
류태형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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