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보리 없는 가파도도 좋다...지금 제주는 거대한 '예술섬'

이은주 2022. 12. 19.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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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제주비엔날레 2월까지
'움직이는 달, 다가서는 땅' 주제
도립미술관 등 총 6곳서 전시 중
제주 특성 살린 공간과 작품 돋보여
비엔날레 어떻게 지속할 지 주목
제주 가파도 글라스하우스 전시장. 홍이현숙 작가의 '가파로도 온 것들'이 전시돼 있다. 이은주 기자
제주 가파도 글라스하우스 안에 전시된 홍이현속 작가의 '가파도로 온 것들'. 사진 제주비엔날레
이탈리아 작가 아그네스 갈리오토가 가파도 폐가 빈 벽에 그린 프레스코화. 이은주 기자

평생에 이런 나들이 한 번 떠나볼 만하다. 제주 모슬포항에서 배를 타고 가파도에 가는 것. 가파도는 4~5월 청보리로 유명하지만, 이번엔 겨울도 괜찮다. 배로 10여 분 만에 닿은 이 섬의 폐가에서 26세의 이탈리아 작가 아그네스 갈리오토가 그린 프레스코화를 볼 수 있다.

제주비엔날레가 섭외한 이 작가는 빈집이었던 이곳의 쓰레기를 치우고 자신의 어린 시절과 가파도에서 보낸 시간을 담아 총 5개 방에 그림을 그렸다. 가파도 폐가의 역사와 이방인 작가가 이곳에서 4개월간 밤낮으로 땀 흘리며 보낸 시간이 하나가 됐다.

가파도 선착장에서 15분 거리의 글라스하우스에도 '작품'이 놓였다. 홍이현숙(64) 작가의 '가파도로 온 것들'이다. 작가는 섬으로 밀려온 스티로폼 부표와 플라스틱 등 쓰레기를 모아 통유리 전시장 안에 돌담처럼 차곡차곡 쌓고 그 위에 청보리 씨앗을 뿌려놓았다. 대단한 볼거리를 기대하고 찾아온 이들에겐 헛웃음 자아내는 쓰레기 더미이지만, 인간과 자연과의 공생을 기원하는 작가의 뜻이 선명하게 전해진다. 이 밖에도 가파도는 아트 레지던시 AiR와 곳곳에 앤디 휴즈, 심승욱, 윤향로 등의 작품을 품었다.

제3회 제주비엔날레가 ‘움직이는 달, 다가서는 땅’을 주제로 제주도립미술관과 제주현대미술관,삼성혈,가파도AiR, 미술관옆집 제주,제주국제평화센터 등 6곳에서 열리고 있다. 16개국 55명(팀)의 작가가 선보인 165점의 대표작이 제주 곳곳에 '숨은 보물'처럼 깔렸다. '2022 제주 아트 맵' 하나 손에 들고 6개 전시장을 차례로 찾아다니다 보면 뻔한 관광 코스와는 전혀 다른 1박 2일의 특별한 예술 여행이 완성된다.


제주비엔날레의 실험


제주도립미술관에 전시된 강요배 화백의 대형 회화 '폭포 속으로'. 세로 가 6.7m에 이른다. 제주비엔날레
가파도에 설치된 영국 작가 앤디 휴즈(56)의 설치 작품. 주민들이 설치한 쉼터 공간에 자연스럽게 작품을 더했다. 작가는 4개월동안 가파도에서 지내며 발견한 프라스틱 쓰레기를 작품에 끌어왔다. 이은주 기자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제주에 미술 비엔날레가 과연 필요할까? 이미 광주비엔날레와 부산비엔날레가 있는데 굳이 제주까지 나설 필요가 있을까? 2017년 첫 회 이후 여러 갈등과 잡음을 딛고 5년 만에 개막한 이번 제주 비엔날레는 차별화한 정체성과 높은 전시 완성도로 이에 대한 대답을 명확하게 제시했다. 답은 '오히려 제주이기에 더 큰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자연과 생명, 인간의 조화를 다룬 작품들이 제주의 독특한 역사와 문화가 전시장 곳곳에서 독특한 울림을 낸다는 평가를 받았다.

자연 경관에 스며든 작품들


제주 시조의 신화를 간직한 공간 삼성혈 숲에 설치된 신예선 작가의 작품 '움직이는 정원'. 이은주 기자
주제현대미술관 앞에 설치된 김기대 작가의 '바실리카'. 관람객이 미로와 같은 길을 직접 걸으며 제주의 자연을 체험하고 바라볼 수 있게 한 것이 특징이다. [제주=뉴시스]
삼성혈에 설치된 박지혜의 '세 개의 문과 하나의 거물'. 제주 신화에서 출발한 영상작업이다. 제주비엔날레
주제관은 제주시에 위치한 도립미술관과 저지리에 위치한 제주현대미술관 두 곳이다. 도립미술관엔 자연을 주제로 작업해온 국내외 36명 작가 작품이, 현대미술관엔 미디어 아트 중심 작품이 나뉘어 배치됐다. 도립미술관 로비에 설치된 김수자(65)의 무지갯빛 설치작품 '호흡'부터, 마당에 설치된 '아트퍼니처 거장' 최병훈의 조형구조물 등 작품 다수가 자연스럽게 장소에 스며든 게 큰 특징이다. 특히 탐라 시조 신화를 간직한 삼성혈의 나무 기둥을 명주실로 감싼 신예선(49) 작품은 관람객이 제주의 역사와 생태 환경을 온몸으로 체험하게 한다. 그 자체로 제주를 대표하는 장소들이 예술을 입으며 감동과 의미를 더한 공간이 됐다.

제주를 주제로 작업한 작품도 돋보였다. 강요배(70)의 세로 길이 6.7m의 대작 '폭포 속으로'는 제주 자연의 장엄함을 드러냈고, 제주의 산수를 세밀한 회화로 담은 유창훈(57)의 ‘한라에서 성산까지’, 군산 오름에서 바라본 제주를 9m 화폭에 담은 박능생(49 )이 ‘제주-탐라여지도’도 눈길을 끌었다. 제주국제평화센터 전시장에선, 1년 내내 제주에서 일기 쓰듯 128점의 그림을 그린 노석미(49), 해녀복을 수집해 해녀들이 몸을 말리는 ‘불턱’을 설치작품으로 만든 이승수(45) 등의 작업이 고루 빛났다.


지속성 관건은 '시스템'


이번 제주비엔날레를 두고 미술계에선 '올해는 과연 괜찮을까' 하는 우려가 컸다. 2017년 첫 회가 열린 이후 부실운영과 여러 갈등으로 존폐 위기까지 갔고, 2020년 예정됐던 2회 행사는 논란 속 코로나19 사태까지 겹치면서 취소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행사는 제주의 비엔날레 운영 역량을 평가하는 시험대로 주목받았다.

다행히도 3월에 예술감독으로 선정된 박남희(53) 예술감독은 지역의 특성, 소통하는 예술에 방점을 찍은 전문성과 기획력으로 전시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8억5000만원(전시예산 8억 5000만원)의 예산을 가지고도 6개 전시 공간의 특성을 살리고, 국내외 작가를 가리지 않고 작품 하나하나가 돋보이도록 연출한 점이 남달랐다. "생태와 환경을 위해 전시 쓰레기를 최소화기 위해 최소한의 전시 디자인을 지향했다"는 전략도 특별했다.

그럼에도 이번 비엔날레는 '지속가능성'이라는 면에서 여전히 큰 과제를 남겼다. 두 번의 행사는 비엔날레를 위한 별도의 조직 없이 '1회용'에 불과한 예술감독이 이끄는 형식으로 개최됐지만, 계속 이렇게 운영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다. 역량을 갖춘 예술감독을 선발하고, 안정적으로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조직위원회 설립 등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이번 제주비엔날레가 국내외 작가를 적절하게 조화시켜 이질감 없이 하나의 전시로 이어간 점은 매우 특별했다"면서도 "제주비엔날레가 지속하기 위해선 별도의 재단 설립 등 특단의 조치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박 예술감독은 "해외 유명작가들을 섭외했을 때 제주라는 섬의 매력 때문에 하겠다고 답한 경우가 많았다"며 "제주엔 앞으로 더 발굴돼야 할 위성 전시공간이 매우 많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일깨우며 예술의 힘을 전할 수 있는 강력한 미술 플랫폼으로 비엔날레가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행사는 내년 2월12일까지.

제주=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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