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모모의 공간

조효석 2022. 12. 19.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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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석 사회부 기자


한 작은 마을에 낡은 원형극장이 있다. 버려진 지 수백 수천년은 된, 아무도 찾지 않고 아무 데도 쓰이지 않는 공간이다. 이곳에 어느 날 떠돌이 소녀 ‘모모’가 머물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재주가 있었다. 처음엔 그를 측은히 보던 어른들은 하나둘 아이의 친구가 돼 고민을 털어놨다. 동네 꼬마들은 틈만 나면 이곳에 모여 종일 모모와 놀았다. 그의 거처인 극장은 사람들의 사랑방이자 놀이터가 됐다.

위기가 찾아온 건 ‘시간도둑’들이 마을을 덮치고 나서다. 그들은 시간을 아껴야 돈을 번다고, 그래야 미래가 보이고 보람찬 인생을 산다는 구호를 마을에 퍼뜨렸다. 모모와 매일 둘러앉아 수다를 떨며 울고 웃던 사람들이 하나둘 곁에서 사라졌다. 극장은 다시 빈터가 됐고, 모모는 마을을 떠났다. 사람들은 이따금 그를 그리워했지만 찾아 나설 시간조차 내지 못했다.

동화작가 미하엘 엔데가 1973년 발표한 작품 ‘모모’는 현대사회를 향한 은유로 가득 차 있다. 효율과 이익의 논리가 공동체를 잘게 부숴내는 모습이 동화로 읽을 수 없을 만큼 의미심장하고 섬뜩한 묘사로 적혀 있다. 윤택한 삶을 위한 우리의 발버둥 탓에 삶이 외려 빈곤해지고 획일화되고 있다고, 그럼에도 우리는 눈치를 못 채고 있다고 책은 말한다.

서울 은평구 불광역에서 몇 분 걷다 보면 ‘서울혁신파크’가 나온다. 효율과 이익에 매몰되기로는 어느 곳에도 뒤지지 않는 서울이란 도시에서 이곳은 이질적인 공간이다. 널찍이 개방된 운동장에서 공을 갖고 노는 아이들 옆에 주민들이 가꾼 텃밭이 있다.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들, 자전거나 ‘씽씽카’를 몰고 나온 꼬마들이 공터를 깔깔대며 누빈다.

저녁에는 ‘피아노숲’에서 은은한 조명이 꾸민 전경을 보며 지친 하루를 위로할 수 있다. 봄과 여름에는 돗자리를 들고 소풍 나온 이도 많다. 시를 읽어주는 낭독회가 열리고, 주민들이 그린 그림을 건 전시공간도 있다. 자리 사이가 넓어 붐빌 일이 적은 카페는 음료를 사지 않고 앉아도 눈치 볼 일이 없다. 입주한 사회적 기업이나 단체에서 무료로 목공, 폐플라스틱 재활용 교육을 받을 수도 있다.

혁신파크는 요즘 시끄럽다. 역세권 금싸라기 땅을 효율적으로 활용 못한다는 이유로 재개발 계획이 발표되면서다. 계획 수립에는 여당 출신 시장과 야당 출신 구청장까지 여야 가릴 게 없다. 50층짜리 빌딩을 지어 쇼핑몰과 사무공간, 나아가 실버타운까지 만든다는 거창한 청사진이다. 계획서엔 개발, 효율, 발전, 성장이라는 수식이 어지러이 채워져 있다.

얼마 전 이곳에서 전단지를 하나 접했다. ‘혁신파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아시나요?’라고 적힌 종이는 이 공간이 각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가치란 뭔지를 묻고 있었다. 궁금함에 수소문하다 연락이 닿은 건 겨우 열일곱 나이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혁신파크에 캠퍼스를 둔 1년짜리 대안교육 학교 ‘오디세이 학교’ 졸업을 앞두고 이 공간을 지키려 애쓰는 중이다.

아이들은 혁신파크가 특별한 공간이라 입을 모았다. 오가며 만난 강아지와 벚꽃 나무, 피아노숲의 야경, 공원에서 어울려 추던 춤에 대해 털어놨다. 한 아이는 하교시간에 혁신파크에서 숲 사이로 올려다본 하늘이 서울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했다. 굳이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진을 빼지 않아도 편히 쉬다 가는 곳이라고, 그런 공간은 이곳 말고는 서울에 없단 이야기도 나왔다.

동화의 끝에서 모모는 시간도둑을 몰아내고 친구들과 자신의 공간을 되찾는다. 현실은 다를 것이다. 효율과 이익의 논리가 모든 가치를 압도하는 이곳에 모모의 공간은 남아나기 힘들다. 아이들은 그렇더라도 이 공간이 어떤 의미인지 사람들이 기억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도시에서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게 뭔지, 어떤 공간이 있어야 하는지를 사람들이 더 잘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 말이 가벼이 들리지 않았다.

조효석 사회부 기자 prome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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