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 나의 ‘아파트 입주기’

2022. 12. 19.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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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소 성균관대 명예교수·퇴계학연구원장


나는 지금으로부터 50여년 전 서울의 변두리인 수색동에 살림집 한 채를 마련했다. 그때만 해도 수색동은 매우 낙후한 동네였다. 도로포장도 되지 않아 비가 오면 꼭 장화를 신어야 했고, 시내버스도 정기 노선이 없어 남가좌동으로 가는 버스 중 대여섯대 만에 한 대가 ‘수색’ 팻말을 달고 수색으로 들어와줬다. 내가 사는 곳이 수색이라고 말하면 듣는 사람은 으레 ‘수색이 서울이냐?’고 묻곤 했었다. 그렇게 후진 곳으로 들어간 것은 집값이 저렴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120평 되는 대지가 내 마음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지은 낡은 목조건물이었지만 나는 이 집을 구입한 후 정성스레 가꾸었다. 마당 주위에는 감나무, 대추나무, 모과나무 등 각종 과일나무와 목련, 장미, 매화 등 꽃나무를 심고 마당엔 상치, 쑥갓, 들깨, 고추, 부추, 토마토 등을 심었다. 그래서 과일 따 먹고 채소 베어 먹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상치, 쑥갓, 들깻잎은 우리 식구가 먹고도 남아 이웃에 나눠주기도 했다.

이곳에서 나는 45년을 살았다. 이사 온 후 몇 년을 살다가 건물이 너무 낡아 기존 건물을 헐고 단층집을 새로 지었지만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줄기차게 같은 장소에서 45년을 산 것이다. 그러다가 45년 만에 ‘쫓겨났다’. 이곳이 재개발된 것이다. 나를 비롯한 몇몇 주민들이 재개발을 반대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파트 공화국’에 사는 사람은 ‘아파트 국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45년을 산 보금자리에서 쫓겨난 나는 아파트를 짓는 약 3년을 다른 아파트에서 전세로 살았다. 워낙 오랫동안 단독주택에서 살았기 때문인지 전세로 사는 3년 동안 아파트 생활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지금은 재개발된 수색동의 아파트에 정식 입주한 지 2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아파트 생활이 낯설고 불편하다. 공동주택으로서의 아파트가 갖는 장점이 있겠지만 나에게는 단점이 더 많아 보였다. 아파트에서는 항상 긴장하고 조심해야 한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는 하루가 멀다고 층간소음과 흡연에 대한 방송을 내보낸다. ‘방문을 소리 나게 쾅 닫지 말라’, ‘밤에는 피아노를 치지 말라’, ‘집안에서 걸을 때는 뒤꿈치를 들고 걸어라’, ‘이른 아침이나 심야 시간에는 샤워를 삼가라’에서부터 ‘생선 굽는 냄새를 풍기지 말라’에 이르기까지 조심하고 삼가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마음 놓고 소리 한 번 외칠 수도 없다.

이게 어디 사람이 사는 주거 공간인가? 단독주택에 살 때는 이웃과 음식을 나눠 먹기도 했고 김장 때는 서로 품앗이하면서 돕기도 했다. 훈훈한 인정을 느낄 수 있었다. 아파트에 갇혀 살고부터는 이웃과의 소통이 단절됐다. 우리 집 이외에는 적막강산이다. 서로 알려고도 않고 알려지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세대별로 고립된 삶을 살고 있다. 이러니 혼자 살다가 죽어도 외부에서 알 수가 없다. ‘이웃사촌’이란 말은 먼 옛날의 말이 돼버렸다.

아파트 입주민들의 건강 문제도 심각하다. 아파트의 주원료인 시멘트를 만드는 데 폐타이어, 폐플라스틱, 폐합성수지, 폐비닐 등을 소각해 사용하기 때문에 이 쓰레기 시멘트로 지은 아파트에는 발암물질 등 각종 유해물질이 검출된다고 한다.

그런데도 아파트 인기는 날로 치솟아 현재 우리나라 인구의 약 70%가 아파트에 거주한다고 한다. 아파트 인기가 높은 것은 아파트를 생활공간이라기보다 신분 과시와 재테크 수단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동네에 사느냐가 일차적으로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고 그 동네의 무슨 아파트, 나아가서 몇 평 아파트에 사느냐가 그 사람의 신분을 확인하는 지표가 됐다.

온라인상에 ‘부동산 카스트 제도’라는 말이 떠돈다. 카스트는 인도 사회의 계급을 가리킨다. 최상층의 사제인 브라만, 귀족 계급인 크샤트리아, 서민인 바이샤, 천민인 수드라가 카스트의 구조이다. 이 카스트 제도는 엄격해 계급 간 이동이 불가능하며 세습적으로 물려받는다. 여기에 빗대어 가격 15억원 이상의 아파트를 소유한 사람을 브라만, 9억원에서 15억원 사이의 아파트 소유자를 크샤트리아, 9억원 미만의 아파트 소유자를 바이샤, 무주택자를 수드라로 부르는 것이 부동산 카스트 제도다. 어쩌다가 이런 말까지 생기게 됐는지…. ‘아파트 공화국’의 미래가 암울하다.

송재소 성균관대 명예교수·퇴계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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