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욱의 시시각각] 156분 드라마, 3분 20초 다큐
156분. 지난 15일 제1차 국정과제 점검회의는 예정된 100분을 56분이나 넘겨 생중계됐다. '국민 패널' 100명이 윤석열 대통령을 둘러싼 무대 구성은 타운홀 미팅을 연상시켰다. 긴 시간이 지루하지 않도록 흥행을 위한 양념들도 제공됐다. 찰떡궁합인 윤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호흡 역시 볼거리 중 하나였다. 윤 대통령이 "마약값이 떨어진다는 건 국가가 단속을 안 했다는 것, 부끄럽다"고 하자 한 장관이 "지금부터 전쟁하듯 막으면 막을 수 있다"고 이어받는 장면도 있었다. 월드컵 포르투갈전 손흥민의 어시스트, 황희찬의 슛처럼 물 흐르는 듯한 연결이었다. '검수완박'으로 폐지됐던 검찰의 마약 수사 기능을 시행령으로 복원시킨 조치에 대한 두 사람의 주거니 받거니 발언, "국민이 다 보고 계셔 좀 긴장이 된다"(윤 대통령) "언론이나 국회에서 질문받을 때 별로 긴장하지 않았는데, 국민에게 직접 질문받으니 참 많이 떨린다"(한 장관)는 소감도 미묘하게 닮았다.
능수능란한 연출의 드라마 같았다. 악역의 존재나 갈등구조 부재로 지나치게 매끄러운 게 오히려 흠이랄까. 긴장감에 질문을 잇지 못한 국민 패널의 무대공포증이 역으로 매력적이었다. 14명의 패널과 대통령·장관의 친절한 문답은 '약속 대련'의 느낌이었다. 일부 언론은 "점검 회의란 제목이 무색하게 노동·교육·연금 개혁의 구체적 계획 제시가 없었다"며 맹탕 회의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형식적으로 애초에 적들끼리 맞붙는 사생결단식 토론은 아니었다. 내용으로도 "개혁하지 못하면 다 망한다"는 대통령 의지 천명의 의미가 작지 않았다. 어쨌든 전작(前作)인 10월 비상경제 민생회의 때보다 진일보했다. 그래서 종편의 야당 성향 정치평론가도 "80점은 된다"며 후한 점수를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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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패널 참가한 생중계 회의서
대통령 "인기 없어도 반드시 개혁"
'약속 대련' 넘는 대국민 설득전을
」
윤 대통령과 국민 양쪽 모두에 이번 생중계는 소통 갈증 해소의 무대이기도 했다. 도어스테핑(출근길 약식 회견)이 MBC와의 극단적 갈등 탓에 자취를 감춘 뒤 거의 한 달 만이었다. 용산시대의 상징인 도어스테핑은 취임 이튿날부터 모두 61차례 총 3시간23분에 걸쳐 진행됐고, 평균시간은 3분20초 남짓이었다. 지난 15일 생중계가 한 편의 드라마라면 도어스테핑은 다큐멘터리였다. 즉석 답변이 정치적 논란을 낳곤 했지만, 반대로 대통령의 출근길 발언을 든든해 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중단 이후 국정 지지율이 상승세를 타면서 도어스테핑엔 '지지율 하락의 주범'이란 달갑지 않은 낙인까지 찍혔다.
국정과제 회의에서 윤 대통령은 "인기는 없지만 반드시 해내야 한다"며 3대 개혁의 완수를 국민 앞에 다짐했다. 막상 구체적인 개혁 프로그램이 가동되면 기득권의 저항과 야당의 견제가 엄청날 것이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생중계에서 말했듯 국민의 압도적 여론으로 반대론을 주저앉히는 길 외엔 방법이 없다. 그러려면 친절하고 물러터진 '엄선된 국민 패널'과의 약속 대련만으론 어림도 없다. 우리 편, 상대편을 불문하고 현장 출입기자들과의 불편하지만 치열한 논박, 반대 세력들과의 처절한 논리 대결 없이는 개혁을 위한 단추를 끼우기 어렵다. 지난 정부에서 혈혈단신으로 정권과 맞섰던 윤석열다운 뚝심으로 40%의 벽 너머에 있는 중도층과 반대 세력을 설득해야 한다.
"대통령실을 국방부로 옮기면 1층에 큰 기자실을 만들겠다. 그 소통의 장에서 언론에 자주 두드려 맞을 것이다. 내가 공격을 세게 받아야 기득권이 타파되고 개혁이 된다." 윤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 주변에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라고 한다. 이런 늠름한 초심이라면 156분의 드라마든, 3분20초의 다큐멘터리든, 어떤 소통이든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도어스테핑을 언제 어떻게 다시 시작하느냐, 기자실을 어디로 옮기느냐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국민을 열광시켰던 윤석열 표 정면 돌파 본능을 3대 개혁 추진의 마중물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서승욱 논설위원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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