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욱의 미래를 묻다] 한국은 이미 과학선도국…성과주의 경계해야

2022. 12. 19. 00:3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5차 과학기술계획(2023~2027)에 담긴 것


박상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내년부터 5년 동안 펼쳐질 과학기술정책의 방향을 담은 제5차 과학기술기본계획이 발표됐다. ‘과학기술이 선도하는 담대한 미래’를 비전으로 설정하고, 임무 중심으로 연구개발의 전략성을 강화하는 것, 민간 중심 혁신생태계를 가꾸는 것, 과학기술로 국가적 현안 해결에 나서는 것을 주요 방향으로 잡았다.

과학기술기본계획은 과학기술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다. 원래 대통령 임기와 주기를 맞췄었는데, 대선이 5월로 당겨지면서 임기 2년차부터 시작되는 계획이 됐다. 하지만 대통령 국정과제와의 일관성을 확보한다는 장점이 생겼다.

이번 기본계획은 기술패권경쟁과 공급망 재편이라는 정책환경과의 정합성 및 시의성이 훌륭하다. 임무지향 혁신정책, 기술주권론, 탄소중립을 위한 전환적 혁신정책 등 국내외 학계의 최신 논의와 지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도 평가할 만하다.

「 앞으로 5년 이끌 과기 정책 발표
반도체·바이오 등 12개 과제 압축

연구개발 투자 사실상 감축 주목
단기 성과·효율성에 집착 말아야

해묵은 위기전략은 큰 도움 안돼
데이터에 근거한 청사진 그려야

선진국 못지않은 과학기술혁신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0월 28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국가과학 기술자문회의 제1회 전원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

‘계획은 번지르르한데, 실행이 문제다’ 일갈하고 글을 마무리하면 쉽겠는데, 정부 당국의 실행력이 만만치 않아 그럴 수가 없다. 지난 제4차 기본계획에서 호언장담한 기초연구예산 두 배 증액을 세간의 의구심을 떨치고 완수했고, 일본의 뜬금없는 수출 규제로 터진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사태도 그야말로 ‘임무 중심형’으로 여러 부처가 힘을 합쳐 이겨냈다. 대통령도 반도체와 원자력에 관심이 많고,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와 달탐사선 다누리호가 국민의 성원을 받고 있으며, 미국이 반도체와 이차전지를 중심으로 안보동맹을 과학기술 및 경제 동맹으로의 확장하고 있으니 힘 빠질 일도 없겠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오래된 슬로건이 다시 등장한 것은 반갑지 않았다. ‘배제와 소외’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이제 ‘없는 살림’이 아닌데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는 것 같다. 가뜩이나 이공계 인재가 부족한데, 요즘 젊은이들이 뜨악할 20세기 감성 아닌가. 정부 자료에는 자책이 가득하다. ‘노벨상이 없다’ ‘피인용 상위 1% 논문이 적다’ ‘대학의 경쟁력이 문제다’ 등등. 만족을 모르고 스스로 채찍질하는 것이 한국의 성장동력임은 분명하다.

피인용 상위 논문 일본 앞질러

하지만 한국은 잘하고 있다. 산업뿐 아니라 기초과학도 선진국 수준에 진입했다. 최근 피인용 상위 10% 논문 수가 2.4배 인구의 일본을 앞질렀다. 세계의 미래 과학도에게 말하고 싶다. “한국은 국내총생산(GDP)의 4.8%, 총액으로는 세계 5위 규모의 연구개발비를 지출하는 과학기술 대국입니다. 여러분, 하고 싶은 연구를 맘껏 할 수 있는 한국에서 플렉스(flex)하세요.”

이번 계획은 지난 10월 28일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에서 발표된 12개 국가전략기술 분야를 재차 강조하고 있다. 반도체·디스플레이, 이차전지, 차세대 원자력, 수소, 차세대통신, 바이오, 우주항공·해양, 양자, 첨단로봇, 사이버보안, 첨단모빌리티, 인공지능이 그 12개다. 자세히 보면 12개보다 많다. ‘선택과 집중’ 취지에 어긋날까 봐 억지로 묶은 게 12개다.

이 12개 기술을 뜯어보면 지금 한국이 선도하고 있는 기술도 있고, 주요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술도 있고, 여전히 추격자의 입장에 있는 기술도 있으며, 어쨌든 중요해서 넣어야 하는 기술도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선진 강대국, 과학기술 선도국가의 포트폴리오다. 헝그리 정신의 선도국가. 미스 매치가 분명한데, 어찌 보면 최강의 조합이겠다.

16세기 영국의 국가패권 전략

임무 중심 연구개발의 효시는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 국왕 헨리 8세는 신대륙 개발 경쟁을 위한 해상 진출을 앞두고 국방기술 패권 확보에 나선다. 함포로 쓸 주철 대포의 성능을 높이기 위해 당시 영세했던 잉글랜드 제철업계를 대상으로 공모전을 열고, 우승자에게 배타적 독점생산권과 군납권을 부여했다. 기술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기술자를 관리했다. 신형 대포 개발이라는 임무를 설정하고 요즘 식으로 하면 민간중심 전략적 연구개발, 지식재산권 보장, 혁신유도 공공조달, 기술보안 정책을 패키지로 펼친 것이다.

임무 중심 연구개발은 20세기 맨해튼 프로젝트로 이어졌고 이후 아폴로 계획, 나아가 최근 팬데믹 종식을 임무로 한 백신 개발 프로젝트인 워프스피드 작전(Operation Warp Speed)으로 이어졌다. 즉 임무 중심 연구개발은 전시 또는 준전시의 국가적 동원체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류가 직면한 기후변화 위기는 일국의 범위를 넘어 전 지구적 동원체제를 필요로 한다. 소위 ‘새로운 임무지향 혁신정책’이 등장한 배경이다.

과학기술 혁신정책의 국제표준인 혁신시스템 관점도 국가적 동원체제에 뿌리를 둔다. 국가혁신시스템 관점을 주창한 크리스토퍼 프리만은 2차대전 전후부터 1980년대까지 일본의 눈부신 성공을 분석하다가 정부와 산업계, 그리고 과학기술 연구계의 삼각협업 시스템에 주목했다. 최근 국내 출판된 노구치 유키오 도쿄대 교수의 『전후경제사』(번역판 제목은 『1940년 체제』)는 일본의 혁신시스템이 실은 태평양전쟁에 임한 일본 군국주의의 국가적 동원체제가 전쟁을 대체해 경제발전을 임무로 설정·지속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결국 임무 중심 연구개발이나 국가혁신생태계와 같은 21세기 과학기술혁신정책도 국가나 인류의 존망이 걸린 전시동원체제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위기극복을 위한 과학의 역할

2023년부터 2027년까지를 책임질 제5차 과학기술기본계획도 위기 극복을 위한 과학기술의 역할론을 강조한다. 기술패권경쟁 심화, 국제 정세의 불확실성 확대, 가속화되는 저출산·고령화, 기후위기, 복합화되는 재난·재해 같은 위협 요소가 산적하다. 위기가 맞다. 그리고 과학기술이 역할을 해야 하는 것도 옳다. 인기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진양철 회장(이성민)의 대사 “기술 장사해야 먹고 산다”가 말하듯 한국이 비빌 언덕은 과학기술뿐인 것도 맞다.

하지만 한편으로 씁쓸하다. 국가와 사회를 겁박해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지원을 갈구하는 궁휼함의 낯뜨거움이다. 품격 있는 과학기술 선도국가로서 당당히 설 수는 없는 것일까. 위기론에 기대야 할 만큼 과학기술의 자신감이 부족한 것인가.

경제성장을 우선하는 보수는 과학기술에 우호적이다. 하지만 보수 경제관료가 과학기술보다 더 중시하는 게 있다. 재무건전성, 효율, 그리고 성과주의다. 이들에게 연구개발 투자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에 다름없다. 일단 ‘소부장’ 사태로 급발진한 정부 연구개발 지출 증가세에 제동이 걸렸다.

내년도 정부연구개발예산은 올해 대비 1.7% 증가에 그쳐 정부 예산 증가율 5.2%뿐 아니라 올해 물가상승률(국제통화기금 전망치) 5.5%에 크게 밑돌아 사실상 감축 수준이다. 박근혜 정부 후반 3년의 정부 연구개발 예산 횡보 시절이 되풀이되었다. 이들이 익힌 경제학이 30여년 전 신고전파 경제학인 것이 아쉽다. 신고전파 경제학은 과학기술 진보를 외부효과로 다루었다. 2018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로머 뉴욕대 교수의 ‘내생적 성장이론’(endogenous growth theory, 또는 신경제성장이론)에서는 연구개발을 경제성장의 핵심요인으로 본다. 연구개발은 단기 성과나 효율을 따지기보다는 다다익선이라고 봐야 한다.

‘과학기술정책의 과학화’ 필요

과학기술계에는 내년쯤 경제관료 집단이 벼르는 소위 국가 연구개발 효율화 요구가 있을 것이라 우려한다. 소재는 진화할지언정 해묵은 위기론에 의지해 이 공세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 과학기술이 국가의 사회경제발전과 안보에 이바지한다는 구체적인 근거를 들이밀 수는 없는가. 위기론에 기대기보다 과학기술 지원 정책에 근거가 필요하다는 지적은 백악관 과학기술정책국(office of science and technology policy) 국장이자 국가 과학자문역이었던 존 마버거 3세에 의해 2005년에 이루어졌다.

마버거는 미국과학진흥협회(AAA) 기조연설에서 과학기술정책이 과학적 증거에 기반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하며 어느 정도의 연구개발투자 규모가 적정한지, 기초-응용-개발의 단선적인 삼분법이 여전히 유효한지 문제를 제기했다. 마버거는 과학기술정책에 과학적 증거가 결여되어 있는 역설적 취약성을 지적하고, 현대적인 과학기술혁신 모형 개발, 데이터의 체계적 축적, 그리고 평가 방법의 개선을 요구했다. 이어 과학기술혁신정책의 개선을 위한 사회과학의 발전을 호소하고, 과학기술 혁신정책학 육성을 위한 ‘과학기술혁신정책의 과학화 프로그램(SciSIP)’을 개시했다. 이전까지 과학기술계의 자율성에 맡겼던 과기혁신정책을 사회과학의 새 영역으로 주문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미국과학재단(NSF)의 ‘과학의 과학: 발견·소통, 그리고 임팩트(SoS:DCI) 프로그램으로 지속되고 있다. 과학적 증거에 기반한 과기정책을 위해 한국형 ’과학기술혁신정책의 과학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과학기술 혁신정책학계에도 깊은 고민과 성찰이 요구된다.

박상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