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 북클럽] 이 책을 읽고나서야 새해 계획을 세울 마음이 들었다

김현진 2022. 12. 18.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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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를 읽고

[김현진 기자]

한 해가 저물어간다. 지난 주말 새해 계획을 세워보자는 남편에게 "계획 같은 건 세우지 않기로 했는데"라고 무심코 내뱉고 말았다. 새해라고 나를 바꿔보겠다며 거창한 계획을 세우는 일은 그만둔 지 오래다.

해가 갈수록 체력이 줄어드는 만큼 미래에 대한 기대도 낮아졌다. 오늘도 어제처럼, 내일은 오늘처럼, 그렇고 그런 날들이 별 탈 없이 흘러가길 바란다.

이런 마음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큰 기대를 버린 대신 주어진 매일에 충실하는데 방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실행하기 어려운 목표를 잡아 자신을 채찍질하다 실망하느니 날마다의 자잘한 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런데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조금 더 미래를 낙관해보고 싶다. 그럼에도 지키고 싶은 '평범한 미래'를 구체적으로 떠올려보고 싶다.

책을 읽기 전 작가의 인터뷰를 먼저 찾아보았다. 김연수 작가는 한동안 비관주의에 빠져 글을 쓰지 못했다고 한다. 중년의 위기감, 세월호 사건과 문단 내 성폭력 폭로 같은 부정적인 일을 연달아 겪으며 '세상이 점점 나빠진다면, 소설을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회의했다.

하지만 코로나 19를 겪으며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발견했고 낙관주의로 돌아섰다. 최근 2~3년간 집중적으로 쓴 작품이 담겨 있는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2013년 출간한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이후 9년 만의 단편소설집이다. 세상에 대한 확신을 잃었던 소설가가 '평범한 미래'를 낙관하기까지, 어떤 이야기가 그를 관통했을까.
 
▲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9년 만의 신작 소설집, 미래(시간)와 사랑에 대한 새로운 관점
ⓒ 문학동네
미래를 기억할 수 있다면

소설집의 표제작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30쪽)라는 인상적인 문장이 나온다. '기억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내다'이다.

어떤 사건이 이미 일어나 의식 속에 인상이나 경험이 간직되어 있어야 기억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미래를 기억하라니.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를 어떻게 기억할 수 있단 말인가.

2000년 밀레니엄을 앞두고 지구 멸망이 예견되었던 1999년을 회상하는 이 소설에는 '재와 먼지'라는 소설 속 소설이 등장한다. 동반자살을 결심한 두 사람이 임사체험을 통해 미래에 대한 관점이 바뀌게 된다는 이야기다. 소설 속 두 사람은 죽음을 결행하고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 가는 삶을 살게 된다. 

가장 불행한 현실에서 시작해 두 사람이 처음 만나 행복했던 과거를 향해 역순으로 가는 삶. 그 삶에서 두 사람은 처음 사랑에 빠졌던 기쁜 미래를 기억(상상)할 수 있다. 적극적으로 미래(원래는 과거였던)를 떠올릴 수 있게 되자 거짓말처럼 생에 대한 희망이 되살아나고 마침내 죽음에서 깨어났을 때 두 사람은 다시 주어진 삶을 기쁘게 끌어안는다.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 1999년에 내게는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이 있었다. 미래를 기억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과 일어날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35쪽, '이토록 평범함 미래',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문학동네

긍정적인 미래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믿을 수 있다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 현재가 바뀌고, 100퍼센트에 가까운 확률로 기억(상상) 속 미래가 도래할 수 있다는 이야기. 이미 일어난 과거의 일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일이 현재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소설의 관점이 신선했다. 그런데 이 기적 같은 일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토록 불행할 수 없다고, 이렇게 인생이 끝날 거라고 비관했던 때가 있다. 빚을 내어 큰맘 먹고 열었던 가게를 성과 없이 접었고 코로나19의 유행으로 다섯 살 아이는 어린이집도 갈 수 없던 삼 년 전. 가게를 닫고 아이와 둘이 집에서 발이 묶여 버렸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에 절망했다. 

그때는 평범한 미래조차 상상할 수 없었다. 아이가 날마다 어린이집을 가고 훌쩍 자라 엄마를 찾는 일이 줄어들 거라고, 코로나 19의 공격도 잦아들고 평화로운 일상이 돌아올 거라고는. 하지만 시간은 꼬박꼬박 흘렀다. 아이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많아졌고 나는 이렇게 글을 쓰고 일도 하게 되었다. 

암담하던 그때에도 유일하게 믿었던 미래가 있다. 계속 글을 쓰는 나. 언젠가에도 변함없이 글을 쓰고 있을 나를 떠올리며 매일 글을 썼다.  오 년 후, 십 년 후에도 글을 쓰는 미래를 기억하면 오늘의 글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랬던 어제가 오늘이 되었고 내일로 이어지고 있다. 내게 이토록 평범한 미래-글을 쓰는 '십 년 후의 나'-는 100퍼센트에 수렴하는 확률로 다가올 것이다. 

각자가 짓는 인생 이야기,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

이 책에 실린 여덟 개의 소설을 연결하는 주제는 '미래'(시간)와 '사랑'이다. 여기서 미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막연하고 알 수 없는 미래가 아니라, 개개인이 상상하고 적극적으로 선택하며 기억하는 미래다. 김연수 작가는 '이야기'를 통해 그것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난주의 바다 앞에서', '진주의 결말', '다시, 2010년의 바르바라에게'와 같은 소설에서 등장 인물들은 삶의 전환점을 온몸으로 써 내려간다. 그들은 쓰고 고치고, 스스로 생각을 바꾸고, 그 이야기를 말함으로써 인생을 변화시키고 창조한다. 글'쓰기'를 글'짓기'라고 칭하듯, 각자의 인생은 각자가 선택하는 이야기를 통해 새롭게 지어질 수 있다고 소설은 말한다.

어떤 미래를 상상하고, 선택하고 기억할 것인가라는 물음이 독자에게 남는다. 내게 그 답은 사랑하려는 미래다. 지금의 불행과 고통에 매몰되어 사랑은 다 끝났다고, 더 이상 사랑은 없다고 비관하는 대신, 과거의 사랑을 기억하고 회복하여 오늘 조금 더 사랑해 보려 시도하는 것. 그러므로 미래로 이어질 그 사랑을 기어이 선택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한번 시작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그러니 어떤 사람도 빈 나무일 수는 없다고, 다만 사람은 잊어버린다고, 다만 잊어버릴 뿐이니 기억해야만 한다고,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 211쪽, '사랑의 단상 2014',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남은 12월에는 지난 시절 사랑했던 모든 것을 되감아 보아야겠다. 나도 모르는 사이 켜켜이 내 안에 쌓인 사랑의 기억을 확인해보자. 나무의 나이테처럼 촘촘하게 나를 감싸고 있는 사랑의 기억으로 오늘의 내가 되었음을 발견하지 않을까. 그 기억이 불어넣는 힘으로 2023년에는 용기를 내어 볼 것이다. 두려움 때문에 마음이 가는 걸 접는 대신 무언가 사랑해보려 시도할 것이다. 

돌아오는 주말, 새해 계획을 나눠 보자고 다시 제안해야겠다. 가족들과 둘러앉아 '2023년의 나'를 이야기하고, 서로가 서로의 미래를 기억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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