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가 민주주의 위기 낳았다" 노벨평화상 언론인의 경고
“한때 우리가 살았던 세상은 사라졌다. 이제 우리는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은지 결정해야 한다.”
지난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필리핀 언론인 마리아 레사(59)는 이달 초 출간한 회고록 『권력은 현실을 어떻게 조작하는가』(북하우스)에서 이런 경고를 남겼다.
미국 뉴스채널 CNN, 필리핀 대표 뉴스그룹 ABS-CBN 등에서 기자로 일한 레사는 1980년대 저널리즘의 황금기부터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언론을 대체하기 시작한 최근까지 경험한 베테랑 언론인이다. 2012년 탐사 매체 ‘래플러(Rappler)’를 설립한 뒤로는 로드리고 두테르테 정권이 벌인 ‘마약과의 전쟁’, SNS를 활용한 정치 선전 작전 등의 실체를 파고든 심층 기사를 보도해 정부의 끈질긴 탄압에 시달려야 했다. 두테르테 정권이 지금까지 레사에게 씌운 혐의만 10여건에 달하고, 구형된 누적 형량만 100년이 넘는다.
이같은 억압에 굴하지 않은 성취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레사가 수상 1년여 만에 내놓은 책은 그의 개인적 투쟁기인 동시에, SNS가 장악한 정보 생태계가 어떻게 민주주의의 위기로 이어졌는지 고발하는 탄원서이기도 하다. 회고록 출간을 맞아 본지와 화상 인터뷰를 진행한 레사는 “내가 언론인이 된 1986년 필리핀에서 ‘피플파워 혁명’(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독재정권을 몰아낸 민주화 혁명)이 있었고, 비슷한 시기 한국·미얀마·인도네시아 등의 아시아 국가들에서도 민주화 물결이 일었다”며 “그러나 오늘날 전 세계 민주주의는 그 이전 수준으로 후퇴하고 있다. 지금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창조적 파괴’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Q : 간략한 책 소개를 부탁한다. 한국 독자들에게 이 책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A : 2016년 래플러와 나에 대한 필리핀 정부의 공격이 시작되면서부터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시기부터 기존의 정보 생태계가 완전히 뒤집히고, 사실에 대한 기준과 윤리, 규율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책은 기술이 어떻게 정보 생태계를 변화시키며, 권력이 어떻게 기술을 활용해 언론을 무력화하고, 더 많은 권력을 얻게 되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항상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내느냐’고 내게 묻지만, 실은 나는 용기를 낸 게 아니라, 기자로서 해오던 일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진실 추구라는 기존의 직업윤리를 따르는 것만으로 남은 인생을 감옥에서 보낼 준비를 해야 했다. 이는 비단 특정 국가의 문제가 아니다. SNS는 권력에 민감한 질문을 던지는 언론인을 향한 무기로 점점 더 많이 활용되고 있고, 그 영향으로 전 세계 인구 60%가 독재 성향의 정권 하에 살고 있다.
Q : 페이스북을 비롯한 SNS들은 허위정보를 필터링하기 위해 가짜 계정을 삭제하는 등 각종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보나.
A : 턱없이 부족하다. 그들이 취하고 있다는 조치의 영향은 아직 체감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페이스북의 조치는 너무나 늦었다. 이들이 ‘좌표찍기(brigading)’에 대한 대책을 지난해 도입한 것도 내가 이 문제를 처음 알린 뒤 5~6년이 지나서였다. SNS에서 여론을 왜곡하는 계정들 중에는 가짜도 있지만, 돈을 받고 동원된 사람들이 만든 ‘진짜’ 계정도 많다. 예컨대 2016년 미국 대선 전 도널드 트럼프의 페이스북에 ‘좋아요’를 누른 계정 27개 중 하나는 필리핀에서 생성된 것으로 확인됐다. 나는 이같은 필리핀 내 부패를 2016년부터 지적했지만, 이미 유사한 행위는 세계 다른 지역으로도 퍼졌다. 페이스북뿐 아니라 틱톡 등의 SNS 플랫폼도 매우 해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갖고 있다.
Q : 가짜뉴스가 해롭다는 건 누구나 알지만, 어떤 기준으로 이를 통제할지 정하는 일은 간단치 않다.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는데.
A : SNS상 허위정보는 결코 표현의 자유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이같은 주장이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억누른다. 문제의 핵심은 SNS 기업들이 사실보다 거짓을 압도적으로 빨리 퍼지도록 알고리즘을 디자인했다는 것이다. 언론이 아무리 좋은 심층 기사를 써도, 분노와 혐오를 담은 가짜뉴스보다 더 큰 주목을 받지 못한다. SNS 플랫폼은 마치 ‘거짓말 한번 할 때마다 보상해줄게’라고 아이를 꼬드기는 어른처럼, 인간성의 가장 악한 부분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누가 무엇을 적든 표현의 자유는 보장돼야 하지만, 이를 유통하는 플랫폼에게는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Q : 한국의 경우 포털 사이트가 언론의 게이트 키핑 기능의 상당 부분을 대체한 상황이다.
A : 중요한 건, SNS든 포털이든 공론장에 대한 게이트 키퍼 역할을 하는 플랫폼이라면 투명성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테크 기업들은 기사를 생산하는 비용을 들일 필요 없이 유통하는 역할만 가져간 뒤, 질 나쁜 기사를 더 빨리, 더 멀리 확산되도록 했다. 그게 이용자들의 스크롤을 유도해 자신들의 수익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론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됐다면 편집 기준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방식으로 책임을 다해야 한다. ‘사기업의 비밀이다’와 같은 변명을 해서는 안 된다.
레사는 이 밖에도 정보 생태계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을 책에서 제시한다. 예컨대 여러 언론사가 협력해 사실 확인 단계를 거치면 시민단체, 비정부기구(NGO) 등이 이를 확산하고 연구기관은 허위정보 유통을 감시하는 식의 범사회적 협동 구조를 조직하자는 것이다. 레사는 “장기적으로는 교육과 입법이 해결책이지만, 이게 자리 잡기 전까지는 ‘사실 확인’이라는 본질을 보호할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했다.
레사는 아직 정부의 탄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지만, 여전히 “인간 본성의 선함을 믿는다”고 수차례 책에 적고 있다. 그는 “기자로서 수많은 재난 현장을 취재하면서 위기일수록 사람들은 서로 돕고 친절을 베푼다는 것을 느꼈다”며 “SNS는 인류의 악한 부분을 강화하는 ‘독성 진창’이지만, 인류애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고 했다. 레사는 혼탁한 정보 생태계 속에 무력함을 느끼는 이들을 향해 “우리가 알던 세상은 파괴됐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창조적 파괴’의 순간에 와있기도 하다”며 “희망을 품는 일 말고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그 희망은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마리아 레사=202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1963년 필리핀에서 태어났지만, 10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를 졸업할 때까지 머물렀다. 귀향 후 필리핀 국영방송국 PTV4의 프로듀서로 커리어를 시작해 CNN 마닐라·자카르타 지국, 필리핀 최대 뉴스그룹인 ABS-CBN을 이끌었다. 2012년 독립 탐사매체 ‘래플러(Rappler)’를 세 명의 동료와 공동 창립 후 현재까지 CEO 겸 대표로 일하고 있다.
남수현 기자 nam.soohyo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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