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 없는 회사서 발생한 산재사망, 이렇게 대응했습니다
[정경희]
고 김신영 님이 퇴근하지 못한 날
9월 마지막 금요일, 고인은 점심시간이 넘어서까지 하루 물량을 다 뺀 후 늦은 점심을 먹고, 오후에 언제나처럼 3층 2라인에서 폐수 버리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입사한 지 2개월 갓 넘은 29세 사원으로, 책임감 강하고 붙임성이 좋아 동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 시각 같은 층 1라인에서는 반응기 배관이 막혀 뚫는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작업자와 공무팀이 배관 뚫는 작업을 막 시작하려던 중, 평시 같으면 물방울 같은 것이 받쳐놓은 2L 크기의 통에 똑똑 떨어져야 했지만, 갑자기 폭포수처럼 유증기가 쏟아졌다. 잠겨있는 줄 알았던 메인 밸브가 열려 있었던 것이다. 순간 작업자들은 질식의 위험을 느끼고 대피 명령을 내렸다. 4층 가스누출 위험경보기가 울리고, 대피하라는 말을 서로에게 하며 1라인에서 방화문을 열고 2라인을 통과해 탈출했다. 그러나 2라인에서 일하던 고인은 제때 피하지 못했고, 건물 뒤편 1층 폭발 잔해물 사이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이날의 폭발화재로 김신영 님이 숨졌고, 17명의 노동자가 다쳤다.
우리 아들만 왜 피하지 못했나요?
"생산이 끝났는데 왜 3층에 갔는지 모르겠다. 휴대폰을 걸었는데 안 받았다."
빈소에 온 회사 관리자들은 이런 말을 이구동성으로 유족에게 남기고 갔다. 그러나 경찰조사에서 폐수작업 정황이 나왔고, 휴대폰 수신 내역 조회를 통해 사고 전후 시각에 부재중 전화는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폭발위험이 있는 작업이 안전작업허가서도 없이 작업 중에 이루어진 점, 정전기 발생으로 인한 폭발위험이 있어 휴대폰을 작업장에 유입하지 않도록 권고했다지만 작업장에 방송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점, 긴급대피계획이 허술하여 대피 명령 자체가 전달되지 않은 점, 안전 관리체계가 공무팀 소속으로 경영책임자 직속으로 갖추지 않고 있는 점들이, 참사 이후 객관적으로 드러난 사업주 안전관리 의무 위반 사항이다.
▲ 11월 10일 화일약품 본사 기자회견 후 항의서한을 제출했다. |
ⓒ 화일약품 중대재해 사망사고 대책위 |
화성노동안전네트워크(화노넷)의 대응과 대책위 구성
화성시는 산재 사망률 1위 기초지자체다. 연간 32명의 노동자가 일터에서 목숨을 잃고 있다. 영세 소규모사업장 비율이 유독 높은 화성지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건강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시민사회와 지역 노조는, 2022년 초 화노넷을 출범시켰다. 화노넷은 18명의 사상자를 낸 화일약품 폭발 사고에 대해 대응이 필요하다는 데에 인식을 같이했다.
하지만 지역에서의 대응 경험이 없었던지라 '중대재해 없는 세상 만들기 운동본부'로부터 자문받으며 진행하기로 했다. 민주노총 경기도본부와 수원오산용인화성지부, 3개 진보정당(노동당, 정의당, 진보당)도 함께 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에 대한 유족의 의지가, 대응단위들의 구심점을 만드는 요소였다.
'산업재해피해가족네트워크 다시는'에서 발간한 산재 유가족 안내 지침서는 유가족과 대책위에 길잡이 역할을 해주었고, '다시는'의 조문과 지지는 유가족에게 많은 힘을 주었다. 대책위를 구성하는 각자가 바쁜 와중에도 빈소 지킴이, 추모 현수막 걸기, 기자회견, 서명운동 등 할 수 있는 역할을 나누어 맡아,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10월 15일 SPC 평택공장 사망사고, 10월 21일 안성 건설 현장 사망사고, 10월 29일 이태원 참사…. 이들 끊이지 않는 죽음의 행렬들은 모두 막을 수 있는 인재였다. 진정한 추모는 제대로 원인을 규명하여, 책임자를 처벌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일터에서, 지역에서 죽어간 이들을 추모하고, 안전한 일터와 사회를 요구하는 대책위 주최 추모문화제를 향남제약단지 인근 향남2지구에서 진행했다. 향남에서 처음 열린 추모문화제였다. 문화제에는 동네 어린이, 청소년, 노동자, 시민 등 60여 명이 함께했다.
산재 사망 노동자에 무관심, 무대책인 화성시
대책위에서는 10월 17일, 산재예방 의무가 있는 화성시에 대해 시장 면담 요청 공문을 보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중대재해 사망 사고 노동자에 대해 무대책인 화성시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면담요청서를 전달하고서야, 11월 4일 겨우 시장 면담이 성사되었다. 면담에서는 사업장 관리·감독 권한은 중앙정부의 몫이며, 지자체의 권한이 없다는 변명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지자체가 산재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은 많다. 대책위는 산재 사망 노동자에 대한 시장의 추모 조문, 화성시가 운영하는 전광판과 화성시 홈페이지에 일일 산재 사망 현황 게시, 산업단지에 산재 사망 노동자 추모비 건립, PSM(공장안전관리) 사업장에 대한 전수조사 및 고용노동부와 합동점검, 소규모사업장 안전관리에 대한 장기적 추진 계획 마련 등을 요구했다. 해당 내용들은 11월 20일 합의에 반영되었다.
회사의 형사 합의 종용은 피해자 두 번 죽이는 행위
▲ 11월 12일 전국노동자대회에서 "화일약품 중대재해 사망사고 기소 촉구 서명" 운동에 함께 한 대책위 성원들. |
ⓒ 화일약품 중대재해 사망사고 대책위 |
11월 15일 공식적인 교섭이 시작되었지만, 화일약품은 민형사상 합의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교섭할 수 없다고 나섰다. 피해자에게 합의를 목적으로 처벌불원서나 고소 고발 취하를 요구하는 것은 고인을 두 번 죽이는 것에 다름 아니다. 유족과 대책위는 받아들일 수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회사는 또한 대책위가 재발방지책 마련 과정에 참여하겠다는 것에 대해 본인들의 경영권을 침해받을 수 있어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했다. 대책위는 폭발사고가 일어난 화일약품이 어떤 재발 방지 노력을 하는지 알아야, 노동자가 안심하고 일할 수 있고 시민들 역시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으며, 이것이 화일약품이 노동자 지역주민과 안전하게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겠냐고 되물었다.
화일약품이 막판까지 민사 합의만 받아들여, 본사 앞 농성을 준비하면서 설득과 회유를 위해 애썼다. 결국 화일약품은 재발 방지 대책 수립에 있어 대책위의 의견을 수렴하고, 화성시는 추모비 건립에 적극적으로 협조한다는 내용으로 합의를 끌어냈다. 화일약품은 재발 방지 대책 마련에 대책위의 의견을 수용하였지만, 회사 내부의 노동자 조직이 없는 상태에서 이 대책이 얼마나 잘 지켜질지 알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합의 이후 11월 20일, 참사 발생 이후 52일이 지나고서야 고인의 장례를 치렀다.
경영책임자가 기소되어 처벌될 때까지 지금까지 드러난 경영책임자의 중대재해처벌법과 산업안전보건법 위반만 해도 수두룩한데도, 경찰은 폭발사고 현장에 있었던 4명에 대해서만 기소하여 조사 중이고, 고용노동부는 아직도 중대재해처벌법 해당 여부를 조사 중이다.
합의 이후 조문 온 화일약품 대표는 사과의 자리에서 '사고는 예측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번 사고가 어쩌다 재수 없어 발생한 것이라 생각하는가! 그동안 비일비재하게 해왔던 위험작업들은, 이미 이런 사고를 수없이 예견하고 있었다. 앞으로 이런 작업에서 사고 예방을 위해 필요한 조처를 하겠다고 다짐하기는커녕, 반성 없이 '알아차리지 못했다, 예측하기 어렵다'는 얘기만 늘어놓고 있다. 이는 사업주와 경영진의 안전에 대한 몰이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행태다. 예방할 수 있는 사고를 발생시켜 사상자를 18명이나 나게 만든 화일약품 경영자에 대한 처벌이, 화일약품이 더욱 철저한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대책위는 앞으로 경영책임자 처벌을 향해 싸워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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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정경희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으로 화일약품 중대재해 사망사고 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입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12월 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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