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 내리는 눈, 낭만과 고생 사이

정은경 2022. 12. 17.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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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산 자락 시골 북카페에 눈이 내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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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경 기자]

하늘에서 하늘하늘 춤을 추며 내리는 새 하얀 눈을 손바닥에 받았다. 잠시 머물다 이내 곧 사라진다. 깃털처럼 가볍고 사랑스럽다. 따듯한 손바닥 체온에 녹아 사라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붙들어 두고 싶게 한다. 하지만 순식간에 사라지는 눈이다. 

겨울이 깊어가며 눈도 많아진다. 

어느새 무리를 지어 내려오는 함박눈이 여기 저기 몸을 내려 놓기 시작한다. 서로 몸을 의지하며 켜켜이 쌓여 간다. 쉬지 않고 내리는 눈은 어느 곳 하나 봐주지 않는다. 닥치는 대로 내려 앉아 자리를 잡는다. 뚝심 하나 두둑하다.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버리는 호기가 있다.  
 
 흰 눈 속에 퐁당 빠진 아메리카노
ⓒ 정은경
 
지난 며칠 내내, 사흘 동안 계속 눈이 내렸다. 조금 내리다가 말겠지 하던 눈이 마침내 대설로 변해 그 위력을 당당히 보여주고 있다. 내일 새벽에도 또 내린다고 한다. 순결한 어린 양 같은 눈이 좋으면서도 살짝 걱정이 앞선다. 
   
이 세상 어느 곳, 그곳이 하얀 솜털 같은 보드란 눈을 볼 수 있는 공간이라면 감사해야 할 것이다. 시골 북카페 꿈꾸는 정원도 그렇다.

문수산 자락 북카페 꿈꾸는 정원에도 하얀 눈으로 가득 채워졌다. 흰 눈을 적접 볼 수 있는 곳에서 숨을 쉬며 살아가는 큰 복을 다소 늦게야 깨달았다. 

세상에 태어나서 단 한번도 눈을 구경하지 못한 채 살다 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무리 상상하려 해도 도저히 머릿속에서 떠오르지 않는 그 새하얀 눈을 보는 게 평생 소원인 사람들이 있다는 걸 지금은 알고 있다.

나도 거의 9년 동안 인도 델리에서 살았으니, 눈 구경하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멀리 히말라야 산지로 여행을 떠나야 겨우 볼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한국에서 맞는 눈 오는 날은 마치 하늘에서 선물 보따리를 받는 것처럼 기쁘다. 그저 좋다.

도시와 달리 시골 산속 마을에서 맞이하는 눈 오는 날은 더 없이 운치있고 좋은 날이다.

춤을 추며 내린다. 그러다가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기도 한다. 눈과 자연과 배경이 어우러져 하나의 세상이 된다. 
 
 설산으로 변한 문수산 자락
ⓒ 정은경
 
산수화 같다. 수묵화 같기도 하다. 눈 덮인 설경은 만물을 평등하게 만들어 놓는다. 이럴 땐 겨울이라 좋고, 그래서 겨울에 감사한다.

근사한 병풍을 펼쳐놓은 것만 같은 아름다운 자연 풍경이다. 이러한 자연 속에서 더불어 함께 누리는 삶에는 반드시 치러야 할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온 동네 이웃들은 펑펑 쏟아지는 눈이 소강 상태가 되길 기다렸다. 낭만은 뒤로 하고 꽁꽁 얼어붙기 전에 쌓인 눈을 치워야 할 숙제를 하늘이 내려줬다.

도시에야 염화칼슘이니 뭐니 해서 제설 작업을 서두른다. 그것도 개개인들은 굳이 나설 필요 없이 맡은 이들이 알아서 수고해주니 걱정할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네 사는 시골 마을에는 공동체로 살아가면서 집 앞 도로와 마당을 손수 치워야만 한다. 내가 치우지 않으면 누군가가 나 대신 수고의 땀을 흘려야 한다. 그것도 안 되면 빙판길이 되어 차량과 사람들이 드나들기 어려운 지경이 되고 만다.

조금씩 눈이 소강상태에 들어간 틈새에 삽을 들고, 밀대를 들고, 빗자루를 손에 들었다. 

완전한 소강상태가 아니기에 모자 달린 패딩을 입고 눈을 맞지 않으려고 모자를 뒤집어썼다. 장갑을 끼고 삽질을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서 몸은 더워지고 땀이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수고하세요."

주고받는 인사가 허리의 통증도 다 잊게 하는 피로회복제가 된다. 

눈이 치워진 길은 그래도 조금은 안심하고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것이다. 아침에 빙판길이 되는 것을 미리 방지했으니 뿌듯한 마음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우선 바깥 길과 주창장을 동네 이웃들과 같이 치웠다. 다음엔 우리 집 계단과 주차장, 데크까지 마무리를 하고 나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거실 창을 통해 보이는 문수산 자락 풍경
ⓒ 정은경
 
눈 치우는 제설 시간이 순삭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열심히 눈을 치웠더니 맘껏 운동하고 난 것처럼 상쾌한 기분까지 들었다. 

저녁을 챙겨 먹고 나서, 좀 쉬려고 하니 그제야 몸이 여기 저기가 아프다며 신호를 보내왔다. 

"에고, 우리 내일 아침에 제대로 일어날 수 있을까?"
"아고, 아고고..."

겨울 야밤에 신음소리가 들렸다. 허리도, 어깨도, 팔도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심하다.  부디 내일 아침엔 근육들이 회복돼 있기를.

지난번에 캐나다에서 왔던 지인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나도 주택에서 살고 싶긴 한데, 눈 치우고 낙엽 치우는 거 무서워서 아파트에 살아."

캐나다에  살면 다 정원 있는 주택에 사는 줄 알았다. 그런데, 특히 겨울에 눈이 많이 오는 토론토에서는 주택에 사는 일이 어쩌면 모험일 수도 있겠다 싶다.

캐나다 아닌 대한민국 시골 마을에 사니, 나는 그나마 주택에 겁없이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겨울이 없었다면, 세상에 눈이 없었다면, 보배로운 흰 세상을 어찌 알 수 있었으랴. 눈 오는 날. 흰 눈보다 더 희게 하시겠다는 그 은혜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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