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도 악보도 없다...15년간 무대 570회 선 오케스트라 정체
“15년을 버틴 것만으로도 사실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원동력은 음악에 대한 열정이죠.”
국내 최초이자 세계 유일의 시각장애인 오케스트라를 15년째 이끌고 있는 이상재(54) 단장의 말이다.
2007년 창단한 ‘하트체임버오케스트라’는 지금까지 570회 이상 크고 작은 공연을 펼치며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현재 24명의 단원 중 이 단장을 포함한 14명이 악보를 볼 수 없는 중증 시각장애인이다. 이 단장은 “우리에게 이 오케스트라는 삶의 전부”라고 말했다.
음악가들은 늘 무대가 목마르다. 하지만 성악가나 피아니스트와 달리 관현악 전공자들은 협연 기회가 많지 않다. 그렇다고 독주회를 1년에 서너번씩 갖기도 힘들다. 그래서 대개 관현악단 입단을 원하지만, 시각장애인들에게 월급을 주려하는 오케스트라는 없었다.
그래서 이 단장이 나섰다. 시각장애 음악인들이 공연 기회를 갖지 못해 좌절하고 재능을 썩히는 모습을 두고 볼수만은 없었다. 단원들은 시각장애를 딛고 이화여대, 한국예술종합학교 등 4년제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한 실력자들이다. 국민의힘 비례대표인 김예지 의원도 과거 하트체임버오케스트라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다.
지휘자도 악보도 없는 오케스트라가 어떻게 가능할까. 이 단장은 “시각장애인 오케스트라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 모두가 불가능할 거라고 했다”며 “하지만 실력이 안되는 게 아니니 연습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이들의 연습량은 일반 연주자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설·추석이 낀 주를 제외하고는 매주 서울 서초동 연습실에 모여 4~5시간 이상 합을 맞춘다. 주중엔 지역별, 파트별 연습도 진행한다. 이 단장은 “이제는 우리가 외워서 연주할 수 있는 곡이 250곡이 넘는다”고 말했다.
물론 15년간의 여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10년을 준비해 창단했지만 2년만에 재정난이 찾아왔다. 실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제대로 알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단장이 가장 큰 성과이자 전환점으로 꼽는 건 2011년 미국 뉴욕 카네기홀 공연이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카네기홀이 무대를 내준 건 물론, 안전사고와 테러 우려 때문에 한 번도 허용한 적 없는 암전(暗轉) 공연도 허락했다. 조명을 모두 끄고 귀에만 집중하는 시간, 관객과 연주자가 하나가 되는 이 무대는 하트체임버의 트레이드마크다. 이 단장은 “문을 닫을 때 닫더라도 뭔가 한번 보여주자는 생각에 단원들이 똘똘 뭉쳐 연습했다”며 “이후 국내 공연도 많아지고 2015년 카네기홀 앵콜 공연, 2017년 미시간 국제음악제 참가 등 국제무대도 10차례 올랐다. 장애를 떠나 실력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가장 뿌듯하다”고 말했다.
사실 이 단장의 인생 자체가 도전의 연속이었다. 클라리넷 연주자인 그는 7살 때 교통사고로 시력을 모두 잃고도 중앙대 음대 수석졸업, 미국 피바디 음대 최초의 시각장애인 음악박사라는 타이틀을 따냈다. 귀국 후엔 나사렛대학교 교수이자 하트체임버오케스트라 단장으로 활동하며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오케스트라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매년 새로운 곡, 악보 없이 연주하기 어려운 곡을 선보인다. 오는 20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창단 15주년 기념 정기연주회 때는 국내에선 ‘운명 교향곡’으로 알려진 베토벤 교향곡 5번에 도전한다. ‘바바바밤’으로 시작해 연주 시간이 40분에 달하는 곡이다.
이 단장은 “변화가 너무 많아서 감각과 호흡만으로 연주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곡”이라며 “15년간 우리가 조금씩 이뤄낸 성장이 관객들에게도 힘이 된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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