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집'에서 살아남으려는 순양가 여자들의 공통점 [송주연의 드라마 인물 탐구생활]

송주연 2022. 12. 17.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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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인물 탐구생활 71] JTBC <재벌집 막내아들> 이 보여주는 가부장제의 여성들

드라마 속 인물들의 심리를 탐구해봅니다. 그 때 그 장면 궁금했던 인물들의 심리를 펼쳐보면, 어느 새 우리 자신의 마음도 더 잘 보이게 될 것입니다. <편집자말>

[송주연 기자]

JTBC <재벌집 막내아들>은 무척 매력적인 드라마다. 흙수저 현우가 재벌 3세 도준(송중기)으로 다시 태어나 이미 살아본 현대사를 이용해 복수전을 펼치는 스토리는 카타르시스가 느껴질 만큼 통쾌하다. 진양철(이성민) 회장의 위엄과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자녀들의 고군분투도 흥미진진해 눈을 떼기 힘들 정도다. 이 드라마의 높은 시청률은 많은 이들이 이런 매력에 빠져들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이 드라마에서 순양그룹을 욕망하며, 자신의 목표를 드러내놓고 추구하는 인물들은 모두 남자들이다. 하지만 순양가엔 남자들만 사는 것이 아니다. 진양철 회장의 배우자이자 4남매의 엄마인 필옥(김현), 유일한 딸 화영(김신록), 며느리들인 정래(김정난), 지나(서재희), 해인(정혜영)이 재벌가의 일원으로 살고 있다. 최근엔 현민(박지현)도 성준(김남희)의 배우자로 이 순양가의 일원이 됐다.

이 여자들은 모두 개성이 뚜렷한 인물들이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자신의 욕망을 직접적으로 추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드라마 속의 남자들이 '성취'를 보여주기 위해 기를 쓰는 반면, 이 여성들은 욕망이 없는 듯 지내거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남성을 이용한다.

나는 이 순양가 여성들의 모습에서 지극한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들이 살아남기 위해 형성한 다양한 심리적 패턴을 읽어낼 수 있었다.

'고명' 아닌 '메인 디쉬'가 되기 위한 몸부림
 
 화영은 '고명딸'이 아닌 '메인디쉬'가 되고자 몸부림치는 인물이다.
ⓒ JTBC
   
딸 화영은 한마디로 말하면 '나쁜 여자'다. 순양백화점을 맡았던 그녀는 동료들의 합리적인 의견은 무시한 채 "내가 곧 순양백화점이야"(8회)라고 윽박지르기 일쑤다. 남편 창제(김도현)와의 관계에서도 그녀는 '갑'이다. 창제는 화영을 공주처럼 모신다. 발 마사지를 해주고, 짐을 대신 들어주며, 그녀를 아이처럼 달래는 남편을 화영은 하인처럼 대한다. 이 같은 안하무인의 태도는 아무래도 호감을 사기 힘든 모습들이다.

하지만 나는 화영의 이런 모습이 철저한 가부장의 질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처럼 느껴졌다. 아버지 진 회장은 화영에게 백화점을 경영하게 했지만, 그녀가 그 이상을 누리는 것은 원치 않아 보인다. 진 회장은 4회 남편이 서울시장이 되게 도와달라는 딸에게 "너는 내 고명딸"이라며 집안의 장식품임을 천명한다. 자녀들에 대해 한탄할 때에도 다른 아들들은 '능력이 없다'고 나무라지만 화영에 대해서는 '아빠 말 안 듣는' 딸이라고 비난한다. 오빠인 영기(윤제문)와 동기(조한철)는 화영을 '도와준다'면서 이용하지만, 진정한 경쟁자로 여기지는 않는다.

화영은 결핍감 속에 자라났을 것이다.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가족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야 겨우 의견을 어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유약해 보이는 창제를 남편으로 맞은 것도 이런 결핍을 채우기 위한 역동으로 보인다. 아버지와 오빠들과는 달리 자신을 '모셔주는' 창제의 손길은 아버지와 오빠들에게 당한 '무시'를 보상받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화영은 이런 남편을 앞세워 자신의 욕망을 대리하게 한다. 화영은 "고명이 아닌 메인디쉬"임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하는데(4회)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남편을 서울시장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스스로가 권력을 갖지 못할 때, 남자를 이용해 권력을 취하려는 모습은 가부장사회에서 여성이 힘을 추구하는 대표적인 방법 중 하나다. 하지만, 권력을 갖게 된 남편 창제는 9회 화영이 위기에 처했을 때 가부장의 모습을 드러낸다. 남편의 큰소리 한 번에 두려워하는 화영의 모습이 나는 몹시 안쓰러워 보였다.

주체로서 살기 위해 스스로를 상품화하는 여자

성준의 아내 현민 역시 야망을 품은 여자다. 도발적이고 전략적인 현민은 힘 있는 언론사 현성일보의 딸이다. 순양가는 성준과 현민을 맺어줌으로써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려 한다. 하지만, 현민은 이런 정략결혼에 마냥 수동적으로 응하지만은 않는다.

현민은 성준이 귀국했을 때 직접 찾아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고, 자신이 매력을 느낄 만한 상대인지를 테스트한다(5회). 또한, 도준에게 매력을 느끼고 적극적으로 다가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가 도준에게 접근하는 방식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것이 아니라 '언론사 딸'이라는 배경을 이용해 스스로의 상품가치를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7회 도준의 DMC 사업을 돕겠다고 제안했을 때 현민의 마음은 도준에 대한 호감과 도준의 능력을 이용해 '순양그룹'의 안주인이 되고픈 두 가지 마음이 혼재된 상태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민은 자신의 솔직한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상품성을 더 강조한다. 그리고 도준이 이 제안을 거절했을 때 현민은 성준의 아내로서 순양의 '안주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이처럼 현민은 수동적인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가꾸고자 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택한 방식은 스스로를 상품화하고 수동적인 여성의 모습을 연기하는 것이다. 현민은 자신의 배경을 이용해 가족들을 교묘히 움직이는데, 이를 위해 연약하고 지고지순한 며느리 역할을 자처한다.

아마도 현민은 이런 방식마저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라 위안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발 딛은 현실은 남성을 통해서만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 있는 가부장 사회에서의 여성의 자리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눈빛은 당차면서도 슬퍼 보인다.
  
 현민은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 자신의 상품가치를 이용한다.
ⓒ JTBC
 
전통적 가치관에 갇혀버린 여자들

반면 진양철 회장의 부인이자 현 순양그룹 안주인 필옥은 묵묵히 가족들 뒷바라지를 하며 살아온 인물이다. 필옥은 진 회장의 엄격함에 맞서 자애로움으로 자녀들을 양육한다. 그녀는 엄마로서의 정체감이 매우 강한 인물인데 자녀들에 대해서라면 진 회장에게 맞서 "꼭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냐"며 핀잔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진 회장은 이런 필옥의 말에 꿈쩍도 하지 않는다.

결국 필옥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남편을 향해 분노를 폭발시킨다. 필옥은 진 회장이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자녀들을 제치고 도준을 순양의 주인으로 앉히려 하자 교통사고로 위장해 진 회장을 죽이려 한다(12회). 이는 오랫동안 참고 지내온 필옥이 가부장 진 회장에게 반기를 든 사건인 동시에 자녀들의 성취를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해결하고 자녀의 성취를 통해 자신을 높이려는 전통적 모성의 극단적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계획은 실패하고, 이를 안 도준은 필옥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든 할아버지를 지키세요. 그럼 할머니 자신도 구하게 될 테니까."(12회) 결국, 필옥은 가부장제하에서 여성의 자리에 꼼짝없이 갇히고 만다.

도준의 엄마인 해인 역시 전통적인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을 한다. 배우 출신인 그녀는 스스로 말하듯 "자신 때문에 천덕꾸러기가 된" 남편을 위해 대외활동을 자제한다. 도준에게도 "방해가 되지 않는" 엄마가 되려고 애쓰는 그녀는 자녀들의 개성을 존중해주고, 시가의 부도덕함과는 선을 긋는 현명한 여성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단지 아내와 엄마라는 이유로 남편과 아이들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그녀의 죄책감은 어딘지 답답하고 부당해 보였다.

한편 순양가의 첫째와 둘째 며느리 정래와 지나는 자신들의 남편이 순양을 승계하길 바라지만, 그 마음조차 드러내놓고 표현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식사 중 이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기라도 하면 시아버지 진 회장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이들은 그저 숨죽인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필옥은 아내와 엄마로서의 삶에 충실한 인물이다. 유일하게 진 회장에게 충고를 건네는 인물이기도 하다.
ⓒ JTBC
 
이처럼 <재벌집 막내아들>은 철저한 가부장적 질서 하에서 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들은 남성을 이용해 간접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거나, 스스로를 상품화해 힘을 가지려 애쓴다.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 안에서 목소리를 내다 극단적으로 분노를 표현하기도 하고, 때로는 부당한 죄책감 속에 살아가거나 존재감을 숨긴 채 침묵하며 지내기도 한다. 이는 현실 속 여러 여성들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한 가지 씁쓸한 것은, 카메라가 이 여성들을 담는 각도에서조차 '가부장적' 시선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카메라는 화영, 현민, 필옥의 계략은 좌절되어야 마땅하거나 나쁜 것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도준을 비롯한 남자들의 야망을 타당하게 비추는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반면, 진통적 여성상을 따를 때의 필옥과 지고지순한 해인은 '착하고 현명한 여자'로 그려진다.

나는 시청자들이 이런 시선에서 벗어나 이 여성들 모두를 따뜻한 시선에서 바라봐 주기를, 이들의 고군분투와 인내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봐 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가부장적 질서가 여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면밀하게 관찰해보고, 지금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에 대해서도 한 번쯤 돌아볼 수 있게 된다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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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송주연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serenity153)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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