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전 성수대교 판결문 꺼냈다…'과실범 공동정범' 뭐길래
이태원 참사 부실대응 의혹 수사의 종착역에 다가서고 있는 경찰청 특별수사본부(특수본)는 28년 전 그 사건의 판결문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다. 1994년 10월 21일 32명의 목숨을 앗아간 성수대교 붕괴 사고다. 특수본은 수사 초기부터 이 판결을 참고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난 15일 참사 당일 서울경찰청 상황관리관이었던 류미진 총경의 혐의까지 직무유기에서 업무상과실치사상으로 변경하면서 이 판결의 중요성은 한층 커졌다. 서로 공모하지 않은 여럿이 각자 저지른 과실이 결합한 것이 어떤 사고의 원인이라는 이유로 과실이 있는 모두에게 업무상과실치사상의 ‘공동정범’을 인정한 상징적 판결이었기 때문이다.
성수대교‧삼풍백화점 사고 때 뜬 ‘과실범의 공동정범’
현재 특수본이 피의자로 입건한 21명 중 김광호 서울경찰청장, 이임재 전 용산경찰서장, 박희영 용산구청장 등 17명이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를 받는다. 특수본은 이들 대부분을 주범과 종범의 구분이 없는 ‘공동정범’으로 처벌하는 법리를 가다듬고 있다. 별건이나 다름없는 정보고서 삭제 의혹에 연루된 박성민 경무관 등을 증거인멸교사나 증거인멸 혐의로 구속한 것 외에는 입건된 사람마다 달리 검토했던 직무유기나 직권남용 등의 혐의가 대부분 입증 곤란에 부닥친 상황과도 무관치 않다.
업무상과실치사상은 죄목 자체에 과실범이라는 게 명확하다. 하지만 공동정범은 주로 서로 짜고 고의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실제 실행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든 동등한 비중으로 처벌하기 위한 이론이다. 실수(과실)를 공모했다는 건 모순에 가깝기 때문에 과실범의 공동정범 이론은 논란이 돼 왔다.
논란의 이론이 판결에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것이 성수대교 붕괴사고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 과정에서다. 1997년 11월 대법원은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의 공동정범으로 기소된 성수대교 시공사 현장소장과 사업소장, 서울시 공무원 등 17명을 유죄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당초 1심 재판부는 1995년 4월 17인의 피고인들에 대해 무죄 또는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그러나 1997년 6월 항소심 재판부는 “이번 사고는 트러스 부실 제작과 부실시공 및 공무원들의 안이한 감독, 부실한 유지관리 등이 합쳐 일어난 참사”라며 1심을 뒤집고 관련자들의 공동책임을 인정했다. 대법원 재판부도 이후 “각 단계의 과실만으로 붕괴 원인이 되지 못한다 해도 그것이 합쳐지면 교량이 붕괴될 수 있다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며 “따라서 위 각 단계에 관여한 자는 전혀 과실이 없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붕괴에 대한 공동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봤다.
이후 벌어진 대형 참사에서 해당 법리가 적용되는 사례가 이어졌다. 1995년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도 관련자 13명이 업무상과실치사상죄의 공동정범으로 처벌받았다. 세월호 참사 때도 검찰은 청해진해운 대표 등 관련자 대부분을 기본적으로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의 공동정범으로 묶어 기소했고 2015년 10월 유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묶어야 산다” vs “묶어도 어렵다”
특수본이 업무상과실치사상의 공동정범에 희망을 거는 건 그나마 관련자 처벌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경로이기 때문이다. 지난 5일 이임재 전 용산서장의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에 대한 구속 영장 청구가 기각되자 특수본 관계자는 “고의범에선 피의자가 범행을 부인해도 범행의 사전준비 등 객관적 정황을 통해 고의 입증 가능하다”며 “반면 과실범에선 피의자가 부인하면 객관적으로 결과 발생을 예견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는지, 주의의무 위반(과실)이 실재했는지, 그리고 과실과 결과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지 등 하나하나 입증하는 게 쉽지는 않다”고 말했다. 관련자들의 개별적 과실에 대한 책임을 따로 물을 경우에 생길 수 있는 난관들이다.
경찰 출신인 박성배 변호사는 “단독범으로 기소하면 ‘이 사람의 책임만으로 결과가 발생했다고 볼 수 있느냐’는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되는데, 그러면 무죄가 나올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며 “여러 사람의 과실이 경합해서 나온 결과(이태원 참사)라고 해야 인과관계가 인정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수사에선 관련자 각각의 과실이 무엇인지 빠짐없이 밝혀내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법조계와 학계에선 이 역시 이태원 참사에선 쉽지 않을 수 있다는 견해도 나온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에선 관련자들이 대체로 수직적인 위계관계에 있었다. 관리·감독을 책임지는 공무원부터 설계·시공 책임자들이 그랬다. 이태원 참사 부실 대응의 세 축인 경찰·소방·지방자치단체는 지휘·복종의 관계에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창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리 구성은 할 수 있다고 해도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느냐가 문제”라며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 사고의 경우에는 인·허가 과정 등에서 불거진 각각의 문제가 쌓여 붕괴로 이어졌다는 인과관계가 명확한 데 반해, 그에 비하면 이태원 참사는 과실과 대규모 인명피해라는 결과 사이에 인과성이 뚜렷하지 않다”고 말했다.
한 검찰 출신 변호사는 “가령 이태원 역장의 경우에는 당시 지하철 무정차 통과를 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무정차를 했다면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부터 불분명하다”며 “결과 예견 가능성, 과실의 존재 여부, 과실의 정도 등을 유죄 판결을 받을 만큼 입증하는 게 쉽지 않은 문제”라고 말했다.
한편 특수본은 19일 구속영장이 한차례 기각된 이임재 전 서장과 송병주 전 용산서 112상황실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재신청하고, 박희영 용산구청장 등 구청 관계자들에 대한 구속영장도 추가로 신청할 방침이다.
김남영 기자 kim.namyoung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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