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꺾마' 이 만화로 배웠다…돌아온 '슬램덩크'에 눈물 난 이유 [도쿄B화]
■ 이영희의 [도쿄B화]
「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너무 다른 일본. [도쿄B화]는 사건사고ㆍ문화콘텐트 등 색다른 렌즈로 일본의 뒷모습을 비추어보는 중앙일보 도쿄특파원의 연재물입니다.
」
이번 카타르 축구월드컵에서 놀라운 투지를 보여준 한국팀의 슬로건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를 처음 들었을 때 이 만화를 떠올린 건 저뿐일까요. 어쩌면 월드컵의 열기가 한창이던 지난 3일 일본에서 '드디어' 개봉한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막 관람한 후였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맞습니다. 그 '슬램덩크'입니다. 1990년에서 1996년 일본 잡지 '주간 소년점프'에 연재되며 농구 열풍을 불러왔고, 일본 내 단행본 누적발행부수 1억7000만 부를 돌파한 전설의 스포츠 만화. 한국에서도 단행본 1450만 부 이상이 팔린 이 추억의 만화가 연재 종료 26년 만에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찾아온 거죠.
"뜨겁던 시절 생각 나 울었다"
한국에선 내년 1월 개봉 예정인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원작 만화를 그린 이노우에 다케히코(井上雄彦)가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까지 맡아 기대를 잔뜩 모았습니다. 예상대로 개봉 2주 만에 관객 202만명, 극장수입 30억 엔(약 287억 원)을 돌파하면서 새로운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죠.
"슬램덩크는 제목만 알았다"는 어린 관객들도 있지만, 역시 과거 출판 만화와 TV 애니메이션에 웃고 울었던 중장년 팬들의 반응이 폭발적입니다. 익숙하지만 새롭게 해석된 캐릭터들, 진짜 농구 경기를 보는 듯 실감 나는 연출에 "역시 이노우에"라는 호평이 쏟아집니다. "뜨겁던 젊은 시절의 한때로 돌아간 것 같아 눈물이 펑펑 났다"는 관객도 있습니다.
두 시간 분량의 애니메이션에는 지금도 회자되는 '슬램덩크'의 명대사가 빠짐없이 등장하는데요. "감독님의 전성기는 언제였죠? 저는 지금입니다!"라는 강백호(원작명 사쿠라이 하나미치)의 선언이라든가, "그래 난 정대만(원작명 미쓰이 히사시), 포기를 모르는 남자지" 등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대사가 나왔을 땐 관객들 사이에서 작은 탄성이 나왔습니다. 전국 최고 실력의 산왕공고(원작명 산노공고)와 시합에서 22점이나 뒤처진 북산(원작명 쇼호쿠), 경기 종료 11분을 앞두고 안 감독(원작명 안자이 감독)은 강백호를 빼고 안경선배(원작명 고구레 기미노부)를 투입합니다. 화가 난 강백호가 '경기를 포기한 거냐'고 묻자 안 감독은 답합니다.
포기하면 그 순간이 바로 시합 종료예요.
일본어엔 실제로 '마음이 꺾이다(心が折れる)'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실력의 차이를 느끼며 점점 지쳐가는 북산의 선수들을 보며 산왕공고의 감독은 말하죠. "여기가 승부처다. 북산이 우리의 압박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어!" 하지만 안 감독은 이렇게 선수들을 격려합니다. "내가 산왕이라면 상대의 마음이 완전히 꺾이길 기다리겠지요. (우리는) 꺾이지 않을 테지만…"
과거에 머문 일본 '망가'
'슬램덩크'의 오랜 팬에게 이번 애니메이션은 너무 반갑지만, 한편으로는 착잡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26년 만에 찾아온 슬램덩크 열풍이 과거에 대한 향수를 동력으로 유지되는 일본 만화(망가) 시장의 현재를 보여주는 것 같아섭니다.
'슬램덩크'가 인기를 끌던 1990년대는 일본 만화의 전성기였죠. '드래곤볼', '유유백서' 등 대작들이 세계로 뻗어 나갔고, 아시아는 물론 유럽에서도 일본 망가 바람이 불었습니다. 지금도 최고의 자리에 있는 '원피스' 역시 1997년 연재를 시작한 작품입니다. 이후에도 '진격의 거인'이나 '귀멸의 칼날' 등 대형 히트작이 등장했지만, 문화권을 넘는 파급력은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상황이죠.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10일 자 최신호에서 '한국 웹툰에 가려지는 일본 만화'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는데요. 이 기사에 따르면 지난해 출판만화 시장 규모는 2650억 엔(약 19억 달러)으로 전년에 비해 2.3% 줄어든 반면 글로벌 웹툰 시장 규모는 37억 달러에 달했고 2030년엔 56억 달러 규모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합니다.
한때 세계를 휩쓴 일본 만화가 이렇게 꺾이고 만 건 변화를 거부하는 일본 만화계의 보수성 때문이라고 이코노미스트는 지적합니다. 디지털 문화가 빠르게 확산하는 가운데도 예전의 종이책, 단행본 형식을 고집했고 내용도 소수의 마니아층에만 소구하는 방향으로 점차 변해갔다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과거 10대들이 즐기던 만화 잡지 '주간 소년매거진' 독자의 평균 연령은 이미 30세를 넘어서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지켜나가는 것'의 의미도 있겠죠. 이코노미스트도 일본 만화의 정교한 내러티브와 예술적 경이로움은 웹툰이 따라오기 힘든 경지라면서 그 예로 '슬램덩크'의 작가 이노우에가 그린 시대극 '배가본드'와 미우라 겐타로(三浦建太郎)의 판타지 '베르세르크'를 듭니다. 코트를 달리는 선수들의 숨결, 농구공이 지나간 골대의 출렁임까지 정교하게 구현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고 나면, 일본 만화 예술의 여전한 미덕을 강조한 이 의견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도쿄=이영희 특파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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