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를 지켜보았다… 황망한 죽음 뒤 남은 건 더 말리지 못한 후회뿐

양민경 2022. 12. 17.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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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저자 신아연씨의 소회
그래픽=신민식


“환희여 신의 아름다운 광채여 낙원의 딸들이여, 우리는 빛이 가득한 곳으로 들어간다. 성스러운 신전으로….”

2018년 스위스에서 안락사로 생을 마감한 호주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이 임종 직전 부른 베토벤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 가사 일부다. 당시 104세였던 그는 “질병은 없으나 건강이 안 좋아지면 지금보다 더 불행할 것”이라며 약물이 담긴 정맥 주사 밸브를 직접 돌려 수 분 내 사망했다. 의사 처방 독극물을 환자가 접종한 ‘의사조력자살’ 사례다.

구달의 사례는 이후 호주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논란이 됐다. ‘노인이 특정한 때에 생을 마감하길 원하면 의사조력자살을 허용해야 하는지’가 핵심 쟁점이다. 국내에선 지난 6월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의사조력자살을 합법화하는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대표 발의해 안락사 논쟁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한국리서치가 지난 7월 국내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이 법안 발의에 찬성한다는 응답이 82%에 달했다.

찬반 논쟁이 치열한 안락사 논쟁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은 이렇다. 임종을 앞둔 사람에게 스스로 삶을 끝내도록 제도적으로 돕는 게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일일까.

허름한 창고에서의 마지막 인사… 스위스 안락사 현장

사진=신석현 포토그래퍼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의 작가 신아연(59·사진)씨는 지난해 8월 안락사로 생을 마감한 호주 교민 A씨의 스위스 여행 동행자 9명 중 한 명이다. 스위스 조력사 단체 ‘페가소스’의 도움을 받아 생을 마무리 짓기 위한 여행이었다. 당시 A씨는 64세로 폐암 말기 환자였다. 한국인으로 스위스에서 안락사를 택한 세 번째 사례다.

가족·친지도 아닌 신씨가 이 여행에 동행한 건 A씨가 자신의 마지막을 기록해달라며 그를 초대했기 때문이다. A씨는 호주 교민신문 기자 출신인 신씨의 20년 독자였다. 최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에서 신씨를 만나 스위스 안락사 현장 이야기를 들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죽음을 다루는 한 온라인 카페에서 시작됐다. A씨가 실명으로 활동하는 신씨를 알아보며 대화의 물꼬를 텄다. 스위스행 3개월여 전이었다. 동행 제안을 받은 건 안락사 예정일 한 달 전인 7월. 당시 A씨는 자신의 안락사 과정을 카페에 올리고 있었다.

“게시물을 보며 ‘안락사하려는 사람도 있구나’라고 생각했지만, 그 여정에 동행하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습니다. 저를 대화·글쓰기 상대로 존중해준 그분의 청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스위스 출발을 며칠 앞둔 신씨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제안 거절과 안락사 결심을 돌리기 위해 전화했지만 A씨는 받지 않았다. “너무 일찍 감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라는 메시지만 돌아올 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신씨는 A씨 가족·친지들과 스위스 바젤의 한 호텔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A씨는 4박 5일간의 여행에 동행해 준 일행에게 미리 준비한 선물과 덕담을 일일이 건넸다. 선물은 자신이 아낀 책과 여비, 스위스제 시계였다.

“여행에 동행한 일행을 위한 고인의 배려는 말도 못 할 정도였어요. 영화 시나리오처럼 모든 걸 다 짜놓은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일행이 돌아가며 결심을 말릴 때도 딴청을 피우는 등 대처 방안이 다 있었어요. 그저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락사는 바젤 시내에서 차로 20분 거리의 한 건물에서 이뤄졌다. ‘개러지(Garage·창고)’ 팻말이 붙은 허름한 건물이었다. 직원은 안락사를 준비하며 “보통 일주일에 2명 정도 이곳을 찾는데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찾는 이들이 적다”며 “한국인 신청자도 꽤 늘었다”고 전했다. 건물 내 촬영 스튜디오처럼 차려진 방에서 A씨는 ‘나는 아프고 죽길 원하며 죽을 것이다’란 말을 복창한 뒤 약물 밸브를 돌렸다.

안락사, 유가족에겐 존엄하지 않았다

신씨는 당시 순간과 A씨의 표정, 일행의 얼굴을 결코 잊지 못한다. 곧 현지 경찰과 검시관이 속속 도착했고 일행은 말없이 호텔로 돌아왔다.

“밸브를 돌린 지 8초가 지나자 A씨 얼굴이 탁하고 꺾였습니다. 일행 모두 죄인처럼 앉아있었어요. A씨 아내를 배려해 한국에 오기까지 처지지 않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남편과 출발해 홀로 서울에 온 그분을 보니 마음이 아주 아팠습니다.”

안락사 후 A씨 유해는 국내 한 수목장에 묻혔다. A씨가 안락사를 택한 지 1년여가 지난 지금도 신씨는 ‘외롭지 않았다면, 외국을 떠돌며 뿌리 없이 살지 않았다면 이런 결정을 하진 않았을 것’이란 그의 말이 떠오른다. 신씨는 “유족 중 특히 부인이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있다”며 “아마 버림받은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라고 조심스레 전했다.

신씨는 이 일을 계기로 ‘안락사 반대론자’가 됐다.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린 그분의 결정을 존중했습니다. 말기 암 환자로 병원에 돈을 쓰기보단 좋아하는 사람과 원하는 장소에서 죽음을 택하고 싶을 거라고요. 그런데 실제로 보고 나니, 그분을 더 말리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와요. 안락사 찬성론자에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직접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고요.”

‘안락사는 선진적 제도고, 한국의 안락사 합법화도 시간문제다. 나는 선구자로 남고자 한다’는 고인의 뜻을 따라 펜을 들었지만, 기록은 그 정반대로 쓰였다. 신씨는 “고인에게 면목이 없다”며 책 인세 일부를 호스피스 병동 확충을 위해 기부키로 했다. 고통 대신 죽음을 택하는 고령자를 위한 실질적 대안이 호스피스라고 여겨서다. 이어 “독자가 원하는 결론이 아니란 걸 알았기에 쓰면서도 마음이 참 아팠다”며 입장 선회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죽음 앞에 무신론자는 없다

안락사를 목격한 뒤 신씨가 겪은 변화는 또 있다. 동양철학에 심취한 유물론자이자 무신론자였던 그가 기독교인이 된 것이다. A씨와 마지막에 나눈 대화가 계기가 됐다. “‘나 그만 갈게요’라고 마지막으로 인사하는 고인에게 ‘선생님, 어디로 가시나요’라고 물으니 ‘몰라요, 어디로든 가겠지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곧 영면했습니다. ‘조금 전 멀쩡히 인사말을 한 그분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란 질문이 그때부터 5개월여간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수개월 간 고민 끝에 그는 기독교에서 답을 찾았다. 영혼의 존재, 천국 등 내세뿐 아니라, 신앙 없이 오갔던 호주 이민교회 생활 중 들었던 ‘부활’ ‘구원’ ‘영생’ 등 기독교 핵심 교리도 믿게 됐다. 현재는 서울 주은혜교회(박철진 목사)에서 신앙생활 중이다.

그는 기독교 회심 이후 스위스에서 A씨를 말리지 못한 걸 더 후회한다고 했다. “아무리 유물론자라도 멀쩡한 사람이 죽는 걸 보며 ‘컴퓨터처럼 전원이 꺼졌나 보다’ 할 순 없어요. 자기 죽음이라면 더 그렇지요. 죽음 앞에선 무신론자와 유물론자는 없습니다. 저는 사후 세계의 확신이 없어 그분을 더 말리지 못했어요. 지금은 성경을 그대로 믿기에 예수의 말씀대로 내세가 펼쳐질 것으로 믿습니다.”

신씨의 바람은 조력존엄사 입법화 전 우리 사회에 안락사와 죽음에 관한 사회적 논의가 널리 확산되는 것이다. 그는 “안락사 찬반을 논의하기 전에 죽음을 양지에 꺼내놓고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무르익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며 “이 작은 책이 그 분위기 조성을 돕고, 나아가 안락사 반대에 힘을 보탤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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