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은모의 酒저리]"술, 예술이 되다" C막걸리, 세상에 없던 막걸리를 창조하다
창의적 일에 대한 갈망… 막걸리 양조로 이어져
쌀·누룩에 다양한 부재료로 독창성 더해
천연 컬러푸드 창의적 조합해 전통방식으로 빚어내
올해 양평으로 이전해 지역특산주로 성장 본격화
[아시아경제 구은모 기자]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스위스의 화가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에게 예술은 단지 가시적인 세계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가시적인 것 이면에 있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끄집어내 비로소 보이도록 만드는 것, 그렇게 새로운 감각을 창조해내고 동시에 타인에게 새로운 인식이 싹틀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 그것이 그가 생각한 진정한 예술이었을 것이다.
영감의 기원이 될 수 있는 창조 활동을 예술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구현되는 양태는 무엇이어도 무방하다. 음악일 수 있고, 회화나 건축일수도 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술이 될 수도 있다. 술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끊임없이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곳, 지금까지 보아온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만들려고 시도하는 곳, 'C막걸리'다.
"창의적인 일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최영은 C막걸리 대표는 십여 년의 직장생활을 돌아보면 항상 창의적인 일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막걸리를 빚기 전 자신을 외국어와 경영을 전공하고 금융회사에 입사해 일하던 회사원이었다고 소개했다. 최 대표는 국내에서 대학 졸업 후 벨기에로 유학을 떠나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현지에서 취업해 홍콩과 싱가포르 등에서 경영 컨설턴트로 일했다.
안정적이고 벌이도 괜찮았지만 10년 이상 일하며 새로운 일에 대한 갈증이 커졌다. 회사원 체질이 아님에도 오래 버텼다고 생각한 그는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싱가포르에서 미술사 공부를 시작했다. 미술사 전공은 후에 한국으로 돌아와 경희대 문화예술경영연구소에서 맡은 박물관과 미술관의 경영 컨설팅 업무는 물론 막걸리 양조 일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에게 막걸리가 업으로 다가온 건 싱가포르와 태국을 오가며 생활하던 시점이었다. 최 대표는 “태국의 한 유기농 시장으로 막걸리 빚을 쌀을 사려고 갔을 때인데, 알록달록 너무 예쁘고 품질 좋은 쌀들을 보면서 계시를 받은 것처럼 양조장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며 “그때 처음 양조장 설립을 결심했던 것 같다”고 돌아봤다.
최 대표에게 막걸리가 처음부터 특별한 술은 아니었다. 대학 시절 마시던 막걸리는 시원하게 들이키던 술,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오히려 어린 나이에 해외생활을 시작하며 다양한 술에 노출되는 기회가 많았고, 이는 맥주와 와인, 진 등을 폭넓게 탐닉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최 대표가 막걸리의 매력에 눈을 뜬 건 외국생활이 길어지며 현지의 술들은 이미 섭렵한 이후였다. 그는 “2009년 막걸리 열풍 이후 맛있는 막걸리들이 많아졌다”며 “한국에 휴가 나와 마시던 술들을 외국에서 구하기 어려워 직접 빚기 시작한 게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직접 술을 빚는 일은 2016년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막걸리의 본고장으로 돌아온 만큼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은 열망이 커졌다. 홀로 막걸리를 빚으며 차곡차곡 쌓아 올린 레시피에 체계적인 교육이 더해지자 날개를 달았다. 홈브루어 커뮤니티에서 특이한 술을 빚는 사람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그의 술을 궁금해 하고 맛보고 싶어 하는 이들도 점점 늘어났다. 그렇게 자연스레 C막걸리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2020년 7월이었다.
C막걸리, 그동안 보지 못했던 막걸리를 보이도록 만든다
파울 클레는 “회화작품이 더 순수할수록―데생을 기초하는 형식적 요소들이 더 강조될수록―가시적 대상에 대한 사실주의적 재현은 더 부적절하게 된다”고 했다. 재현의 요소가 많으면 표현의 요소가 줄고, 반대로 표현의 요소가 많아지면 재현의 요소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C막걸리는 재현의 요소보다는 표현의 요소에 집중한다. 쌀과 누룩, 물이라는 원재료로만 빚은 최상의 순곡주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부재료를 함께 발효해 여태껏 보이지 않던 새로운 술을 표현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시 말해 순수한 재료로만 막걸리의 이데아를 재현하려고 할 때 창작자가 독창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줄어드는 만큼 부재료라는 표현의 요소에 집중해 고유한 창조 활동, 즉 예술적 가치를 끌어낼 수 있는 양조를 지향하고 시도한다는 것이다.
최 대표는 시대성과 지역성, 계절성 등 당대의 다양한 사회·문화적 영향을 받으면서 변화하고 진화하는 것이 문화 콘텐츠라고 역설하며, 술 역시 그러한 현대의 문화 콘텐츠라고 강조했다. 그는 “같은 것만 매일같이 품질 관리하는 게 이 일의 전부라면 지루해서 견디지 못할 것”이라며 “변화하는 시대와 문화를 담은 술이 필요하고, 그러한 술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부재료를 활용해 재미있게 변주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완벽하게 가다듬어진 재현 양조도 의미가 있지만 다소 거칠고 평가가 엇갈리더라도 고유한 창조 양조를 실현해나가겠다는 뜻이다.
C막걸리라는 이름에도 최 대표의 이러한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지역이나 재료 등을 앞세우는 일반적인 네이밍과 달리 C막걸리는 외국어, 그것도 알파벳 한 글자를 양조장의 이름으로 내걸었다. 그는 창의적(Creative)이고 다채롭고(Colorful), 세계적(Cosmopolitan)이고, 현대적(Contemporary)이면서도 클래식(Classic)한 수제(Craft) 막걸리라는 의미로 C막걸리라는 이름을 지었다. 최 대표는 “제가 생각하는 다양한 콘셉트가 알파벳 ‘C’ 한 글자에 모두 담긴다”며 “함축적으로 다양한 의미를 담으면서도 확장성이 있고 동시에 임팩트도 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최 대표의 철학과 캐릭터를 꾹꾹 눌러 담아 빚은 술이 바로 ‘시그니처 큐베(Signature Cuvee)’다. 시그니처 큐베는 다양한 부재료를 활용하는 C막걸리의 기본 양조 원칙이 가장 잘 구현된 제품으로, 쌀과 누룩이라는 기본 재료에 주니퍼베리(노간주열매)와 건포도, 배즙을 부재료로 함께 발효시켜 이양주로 빚은 술이다. 애주가를 위한 술을 표방하는 시그니처 큐베는 알코올 도수 12도(%)의 세미 드라이 막걸리다. 전통 누룩을 기본으로 하되 안정적인 발효와 깔끔한 맛을 위해 일부 개량 누룩과 효모를 사용한다.
시그니처 큐베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역시 부재료다. 시그니처 큐베에는 진(Gin)의 필수재료인 주니퍼베리가 사용되는데, 씨와 함께 껍질째 발효해 쌉쌀한 타닌감이 입안에 돌게 한다. 그렇다고 쌉쌀한 맛이 술맛을 지배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최 대표는 시그니처 큐베를 비롯한 C막걸리의 모든 제품에 복수의 부재료를 사용한다. 맛과 향의 복합미를 추구하고 한두 가지 강한 맛과 향이 전체적인 균형을 무너뜨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는 “부재료를 사용하게 되면 부재료 간 최적의 비율을 찾는 것이 레시피 구성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며 “시그니처 큐베는 무난하면서도 특색 있는 밸런스를 찾으려고 레시피 연구를 가장 많이 한 술”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부재료로 주니퍼베리만 넣을 경우 쌉쌀한 맛이 너무 도드라지기 때문에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다양한 식물들의 조합을 테스트해 현재의 레시피가 완성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부재료가 중요한 양조법의 특성상 새로운 부재료를 찾고 그들 사이의 조화에 대한 고민도 중요한 부분이다. 최 대표는 “먹고 마신 음식의 맛과 향을 잘 기억하는 편이기도 하고, 동남아 등 해외생활을 하면서 향신료에 노출된 경험이 많아 아이디어가 다양하게 떠오르는 편”이라며 “허브농장과 약재시장, 디저트와 차, 향수 등에서도 힌트와 영감을 얻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요한 건 부재료의 맛과 향이 쌀, 누룩과 함께 술로 빚어져 발효됐을 때 어떻게 구현되는지 연구하는 것”이라며 “별의별 것을 다 시도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꾸준히 레시피를 쌓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특산주로 전환… 본격 '스케일-업'에 나서다
C막걸리는 올해 3월 서울 강남에서 경기 양평으로 터를 옮기며 본격적인 성장에 나섰다. 최 대표는 2년 전 소규모 주류 제조 면허로 사업을 시작했다. 꾸준히 인지도가 높아지고 판매량이 늘어났지만 온라인 판매가 불가능한 면허의 제한상 성장의 한계가 명확했다. 그는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돌파구는 온라인 판매가 가능한 면허로 전환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며 “중소벤처기업부의 초기창업패키지를 통해 지원을 받고, 지역특산주 면허를 취득해 양평으로 옮겨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지역특산주는 해당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주로 사용해야 한다. 다양한 부재료를 사용하는 C막걸리가 이전을 고민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다. 최 대표는 “이전에 앞서 가장 걱정했던 부분은 막걸리에 다양한 맛과 향을 입힐 수 있는 물감인 부재료의 선택이 제한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며 “하지만 양평은 소규모의 친환경, 프리미엄 농산물을 경작하는 분들이 많아 쌀은 물론 각종 허브 등 다양한 부재료를 얻기에 어려움이 크지 않아 이전을 결정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최 대표는 올해 양평에 다시 깃발을 꽂은 만큼 양평의 지역특산주로 확고히 자리를 잡는 것이 가장 단기적인 목표라고 말했다. 그는 “지역전통주로 인증받으며 전통주로서의 정통성이 생긴 것 같다”며 “서울 강남 도심 한복판의 C막걸리에서 경기도 프리미엄 농산물의 다양성을 입은 C막걸리로 새롭게 태어날 것”이라고 포부를 내비쳤다.
구은모 기자 gooeunm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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