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컬처]아버지와 패딩,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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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갑자기 날이 많이 추워졌다.
그 패딩을 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사 주고 간 그 패딩을 입으면 이불을 두르고 나간 것 같았다.
그래, 뭐, 이번 겨울엔 패딩을 사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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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갑자기 날이 많이 추워졌다. 패딩을 사기 위해 백화점에 갔다가 그냥 나왔다.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옷 한 벌에 수십만 원을 줘야 한다니. 그러고 보니 살면서 그런 옷을 사러 간 게 두 번째다.
내가 서른한 살이고 나의 아이가 막 돌이 지났던 10년 전쯤에,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근처를 지나게 되었으니 잠깐 들르겠다는 것이었다. 그가 서울에서 원주까지 혼자 오는 일도 그 인근을 지나는 일도 거의 처음이었던 듯하다. 아버지는 그때 자신의 차에 나를 태우고 시내의 백화점으로 갔다. 겨울옷을 한 벌 사 주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아니, 갑자기 와서는, 왜, 옷을. 그와 함께 남성복 매장을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표정과 몸짓으로 몇 미터쯤 걷다가, 한 매장으로 들어갔다. 그나마 그와 내가 알 만한 브랜드였다.
아버지는 점원에게 겨울옷을 좀 보여달라고, 따뜻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점원은 요즘 잘나가는 신상품이라면서 빨간색 패딩을 꺼내어 주었다. 나는 그동안 얇은 바람막이를 겹쳐 입거나 고등학생 때 산 겨울 점퍼를 입거나 했다. 그 신상 패딩은 가볍고 따뜻했다. 아버지는 내가 입은 모습을 보고는 괜찮으냐고 물었고, 나는 그에게 괜찮다고 답했다. 그는 "그럼 됐네, 이거 포장해 줘요" 하고 점원에게 말했다. 가격은 80만 원이라고 했다. 그건 내가 그동안 산 모든 옷보다도 비쌌고 어쩌면 내가 몇 년 동안 산 옷의 총합보다도 비쌀 것이 분명했다. 옷 한 벌에 그만한 돈을 쓰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대학에서 시간 강의를 하고 받는 월급의 평균값이 정확히 80만 원이기도 했다. 아니 이거 너무 비싼데, 하는 표정을 짓자 아버지는 무시하고 점원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그는 나를 집 앞에 내려주고 패딩이 든 쇼핑백을 들려주고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 서울로 떠났다. 그는 언젠가부터 나에게 항상 고맙다고 말했다.
내가 살아가는 처지가 그에게 고맙게 보일 것도 아닌데도 그랬다. 아내는 나에게 뭐 80만 원이나 되는 옷을 사 달라고 했느냐고 그것 참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패딩을 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이 찾아왔다.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다. 나는 그때 아침에는 맥도날드에서 물류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했고 점심에는 대학에서 강의를 했고 저녁에는 연구실에서 논문을 썼다.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바깥으로 나오면 온통 얼어붙은 새벽이었다. 차에 시동이 걸리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차창에는 성에가 가득했다. 별 생각 없이 워셔액을 뿌렸더니 그대로 얼어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되는 대로 자동차면허증을 손에 쥐고 나가 얼음을 긁어냈다.
그해 겨울은, 춥지만 따뜻했다. 아버지가 사 주고 간 그 패딩을 입으면 이불을 두르고 나간 것 같았다. 올해도 우선 그 패딩을 꺼내 입는다. 패딩 한 벌이야 살 만큼 형편이 나아지기는 했으나 선뜻 손이 나가지 않는다. 나에게 패딩을 사주던 아버지는 순대국을 좋아한다. 그는 순대국 특을 먹고 싶어도 보통을 먹었다. 아들의 형편을 생각하면 도저히 특에 손이 안 갔다고. 그러나 이제 그는 특을 먹는다고 한다. 그래, 뭐, 이번 겨울엔 패딩을 사러 가야겠다. 그래야 그가 특이 아니라 수육이라도 한 접시 마음 놓고 먹을 게 아닌가.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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