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박지원 "서훈 안보실, 월북 결론…난 도박 빚 발표 반대"
박지원 전 국정원장이 “서훈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의 ‘보안 유지’ 지침에 따랐을 뿐, 나는 의사결정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취지로 검찰에 진술한 것으로 확인됐다.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의 핵심인 ‘월북 판단’은 전적으로 서 전 실장과 안보실의 판단이라는 취지다. 검찰이 사건의 정점으로 지목한 서 전 실장과 거리를 두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박지원 "서훈의 '보안유지' 지침 따랐을 뿐"
서울중앙지검 공공수사1부(부장검사 이희동)는 14일 오전 박 전 원장을 불러 약 12시간 동안 조사했다. 박 전 원장은 “서훈 전 실장이 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하며 ‘보안 유지’를 강조해 전 부처가 따랐던 상황이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조사 과정에서 국정원 첩보가 삭제된 사실은 확인했지만 ‘삭제를 지시한 적은 없다는 기존 입장을 반복했다. 군 당국의 요청을 받고 실무진들이 진행한 거라 경위를 잘 모른다는 주장이다.
반면, 검찰은 국정원 조직 특성상 원장의 지시나 승인 없이 기밀 문건인 첩보가 삭제되는 일은 불가하다고 보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15일 ‘실무진이 알아서 삭제했다’는 주장에 대해 “국정원이 그렇게 허술한 조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서 전 실장으로부터 박 전 원장을 거쳐 하달된 ‘보안 유지’ 지침이 실은 ‘첩보 삭제 지시’였다는 의미다.
이와 관련, 박 전 원장은 미묘한 입장 변화를 보이기도 했다. 박 전 원장은 당초 “국정원 메인 서버에 원본이 남는다”며 ‘삭제’라는 검찰의 논리가 틀렸다고 주장했는데, 조사 이후엔 “오늘 수사를 받으면서 보니까 삭제가 되더라. 중대한 사실을 이번에 알았다”고 말했다. 기존 주장과 달리 보고서 자체가 삭제됐을 가능성을 인정한 셈이다. 다만, 여전히 “삭제 지시는 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월북'은 정책적 판단으로 이해"
서 전 실장과 박 전 원장 등 당시 청와대 안보 라인은 10월 27일 국회 기자회견을 열어 “북한군 감청 자료 등을 종합 분석한 결과, '월북'이 가장 유력했다”고 밝혔다. 당시 서 전 실장은 “사실관계를 규명해 있는 그대로 국민들께 소상히 발표한다는 원칙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며 정치적 고려 없이 최선의 판단을 했다고 밝혔다. 박 전 원장은 이 의사결정 과정에 자신은 ‘결정권’이 없었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법조계에서도 박 전 원장이 ‘월북 몰이’ 관련 혐의에 대해선 기소 대상에서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복수의 야권 인사에 따르면, 13일 소환조사를 받은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 역시 “소관 업무가 아니라서 결정 경위를 모른다는 취지로 진술했다고 한다.
또, 박 전 원장은 “고인의 도박 빚을 비롯한 채무관계 등 신상 정보를 발표하는 것에 반대했다”고 진술했다. 해양경찰은 피살 발생 3일째인 2020년 9월 24일 ‘자진 월북 가능성’이 있다며 “이씨가 평소 채무 등으로 고통을 호소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와 관련, 소 변호사는 “박 전 원장이 빚 문제를 비롯한 개인 사생활은 정부가 나서서 발표할 사안이 아니라는 의견을 개진했었다. 좀 과하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검찰은 서 전 실장의 지휘로 해경, 국방부 등이 이씨의 신상을 공개해 월북으로 몰아가려 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검찰은 서해 사건의 핵심인 월북 결론에서 국정원의 역할을 고려해 박 전 원장을 불구속 기소하는 방향에 무게를 두고 있다. 다만, 상대적으로 혐의가 명확한 ‘첩보 삭제 지시’는 기소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게 검찰 안팎의 전망이다.
김철웅 기자 kim.chulwoong@joongang.co.kr, 허정원 기자 heo.jeo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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