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끝’이라 말할 수 있는 자격

문수정 2022. 12. 16.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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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손님을 맞았지.

참사 초반부터 유가족이나 부상자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었다.

제3자가 쏟아내는 "끝내자"는 말은 아무것도 멈추지 못한다.

참사에서 살아남은 10대 고등학생이 혐오 발언의 홍수에서 살아남지 못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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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정 산업부 차장


“처음엔 경황이 없었어. 내가 장례를 치러봤어야 말이지. 모르는 것투성이라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모든 게 낯선데 내 감정이 가장 어색하더라고. 오랜만에 뵙는 분들이 고맙고 반갑더라니까. 거기서 반가움이라니. 울면서 들어오는 친구를 정작 상주인 나는 미소로 맞기까지 한 거야. 장례식장에 흐르는 정서가 슬픔과 애통함뿐일 줄 알았는데 웃음도 있더라고. 기쁨이나 즐거움의 웃음은 아니지만 말이야. 상복을 입은 누군가가 미소를 띠고 있다고 해서 ‘웃기도 하는 걸 보니 슬프지 않은가 봐’ 한다면, 그건 오해일 수 있어. 상실의 슬픔이 한 가지 표정으로만 들이닥치는 게 아니니까. 나도 겪어보고서야 알았어.

정신없이 손님을 맞았지. 익숙하지 않은 절차를 따라다니고, 준비해야 할 것도 많았어. 계속 서서 인사를 하다 보면 생각할 틈이 나질 않아. 그래서였을까. 장례식을 마치기까지 사흘 동안 엄마의 부재가 현실로 와 닿지 않더라. 다시는 엄마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까마득하게 여겨졌어. 희미하게, 긴가민가.

그렇게 한바탕 북적이고 난 뒤 집으로 돌아오니 집 안이 적막해. 집에 왔는데 엄마가 없어. 방문을 열고 들여다봐도 없고, 현관문 앞에 앉아 한참을 기다려도 엄마가 오지를 않아. 엄마를 부르며 카톡도 보내봤어. 엄마. 엄마, 왜 안 와. 밤이 늦었어. 당연히 엄마는 답이 없어. 내가 보낸 메시지 앞의 ‘1’이 지워지지 않는 대화창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 것 같니. ‘어쩌면 답이 올지 모른다.’ 어디에선가 살아 있을 것만 같았거든. 세상을 떠난 아들에게 안부 문자를 보낸다는 아버지 사연을 뉴스에선가 본 것 같은데, 그분도 나와 비슷했을까.

장례를 마치고 나에게 주어진 공식적인 위로의 시간은 끝이 났어. 그런데 그제서야 내가 겪은 일이 무엇인지 실감이 나더라. 나는 더 이상, 살아 있는 동안 영원히, 엄마를 만날 수 없구나. 장례는 끝났지만 내 슬픔은 끝나지 않았어. 그리고 누구도 내게 ‘그만 슬퍼하라’고 강요할 수 없어. 그건 제3자가 결정할 일이 아니거든. 끝맺을 자격은 내게 있어. 내 슬픔은 계속될 거야. 정도의 차이와 감당하는 방식에 변화가 있을 뿐.”

몇 년 전 엄마를 잃은 친구와 나눴던 대화다. 10·29 이태원 참사 이후 이날의 대화가 떠오르곤 한다. 서울 한복판에서 354명의 사상자를 낸 참사를 대하는 정부와 우리 사회의 방식에 지독한 위화감을 느끼면서다. 참사 초반부터 유가족이나 부상자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었다.

영정사진도 위패도 없는 분향소, 위로와 진상 규명을 앞지른 보상금 논의, 정부가 정한 국가애도기간. 어느 것 하나 당사자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다. 당사자가 배제된 논의, 당사자와 무관한 결정. 오히려 당사자를 무시하고 혐오하는 발언이 난무했다. 49재를 앞두고도 달라진 게 없다. “이제 끝났다” “그만하라” “지겹다”며 제3자들이 되레 고함을 친다.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끝부터 내라고 한다. 희생자 유가족과 참사 현장에서 살아 돌아온 이들의 목소리는 그렇게 혐오 여론에 묻혔다.

그런다고 해서 참사가 ‘없었던 일’처럼 여겨질 수는 없다. 외부에서 아무리 그만하라고 해도 당사자는 그만둘 수 없다. 제3자가 쏟아내는 “끝내자”는 말은 아무것도 멈추지 못한다. 상황만 악화시킬 뿐이다. 참사에서 살아남은 10대 고등학생이 혐오 발언의 홍수에서 살아남지 못한 것처럼. 위로의 손길과 치유의 시간을 거쳐야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일이다. 이제라도 당사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문수정 산업부 차장 thursda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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