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근대화 뒤집기] 유토피아는 ‘없는 곳’, 그래도 더 ‘좋은 곳’은 있다

2022. 12. 16.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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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꿈 ‘이상향’을 찾아서


김기협 역사학자
주어진 세상보다 더 좋은 세상을 바라는 꿈은 문명 발생과 함께 시작되었다. 종교는 이 꿈을 많은 사람이 공유한 현상이다. 기독교의 낙원, 불교의 극락세계를 비롯해서 종교마다 초월의 세계를 향한 꿈이 있다.

이미 ‘낙원’의 꿈을 갖고 있던 기독교 세계에 ‘유토피아’라는 또 하나의 꿈이 나타난 것은 특이한 일이다. 토머스 모어(1478~1535)의 1516년 책 제목에서 나온 이름이다. 종교개혁이 진행되고 있던 유럽에서 종교에 의지하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꿈이 자라난 것이다.

『국가의 최선의 형태와 새 섬 유토피아에 관하여』(De optimo reipublicae statu deque nova insula Utopia)는 제목 그대로 정치적 이상을 그린 책이다. 정치형태의 선택이 매우 중요한 일이 된 근대유럽에서 오래된 ‘낙원’ 대신 ‘유토피아’가 새로운 꿈의 이름이 되었다.

「 1516년 토머스 모어가 처음 제안
사유재산·직업차별 없는 곳 그려

“신대륙 식민지에 만들자” 실험도
“꿈은 이루어질 것” 19세기에 만개

공상적·과학적 사회주의의 충돌
개인주의 극복 향한 부단한 몸짓

유토피아는 왜 ‘없는 곳’이었나

이상향을 지칭하는 ‘유토피아’라는 말을 널리 알린 토머스 모어의 책에 실린 목판화 그림. [사진 The Granger Collection, 위키피디아, freepik]

모어의 유토피아는 대륙에(브라질의 어느 곳으로 설정되어 있다) 거의 붙어있는 직경 200마일가량의 섬으로 6000가구의 도시 54개가 있다. 30가구에서 하나씩 뽑힌 대표 200명이 비밀투표로 도시의 통치자를 선출한다.

사유재산도 없고 직업의 구분도 없다. 농사가 모두에게 주업이고 직조·석공·목수 등 부업을 각자 하나씩 가진다. 생활방식이 소박해서 부업에 높은 수준 기술이 필요 없고 하루에 대여섯 시간씩만 일하면 된다. 단 하나 특별한 직업은 종교와 행정을 담당하는 학자들로, 어린 나이에 소질에 따라 선발된다.

모어는 유토피아를 내부 완결성을 가진 사회로 그리려 했으나 그 성립과 유지를 위해 최소한의 ‘외부’와 ‘타자’를 설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부’로서 대륙이 있었다. 섬 인구의 안정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인구가 늘어날 때는 대륙의 식민지로 내보내고 줄어들 때는 식민지 주민을 불러들인다고 했다.

토머스 모어의 처형 장면. [사진 The Granger Collection, 위키피디아, freepik]

‘타자’로서는 노예가 있었다. 한 가구에 두 명씩 배당되는 노예는 전쟁포로 등 외부에서 획득하기도 하고 내부의 범죄자로 충당하기도 한다. 전쟁을 하되 적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포획하는 데 목적을 둔다. 유혈을 통한 승리를 부끄럽게 여긴다.

후세 사람들은 ‘유토피아’를 ‘이상향(理想鄕)’의 뜻으로 대개 받아들이지만 모어 자신은 라틴어로 쓴 이 책에서 희랍어 ‘ουτόπία’(없는 곳)을 어원으로 내놓았다. ‘Ευτόπία’(좋은 곳)이 아니다. 실제 내용은 ‘좋은 곳’에 관한 상상을 담고 있는데, 굳이 ‘없는 곳’이라고 이름 붙인 까닭이 무엇일까.

두 교회의 성인이 된 토머스 모어

토머스 모어 초상. [사진 The Granger Collection, 위키피디아, freepik]

오늘날 ‘휴머니즘’은 별 고민 없이 쓰이는 말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 속의 휴머니즘에는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인간의 존엄성을 그 자체로 인정한다면, 교회와 신앙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따른다. 휴머니즘의 역사는 종교와의 갈등을 통해 진행되었다.

14~16세기 르네상스 휴머니즘은 인간 이성을 중시한 그리스철학의 재발견으로 시작되었다. 신학 중심의 스콜라철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학문의 길을 열었지만, 아직 종교와 대립하는 단계는 아니었다.

토머스 모어는 목숨으로 신앙을 지킨 사람이다. 헨리 8세가 이혼과 재혼을 위해 잉글랜드 국교회를 만들고 그 수장을 맡는 데 동의하지 않다가 반역죄로 처형당했다. 1935년에 가톨릭 교회에서 성인으로 선포되었을 뿐 아니라 그가 맞섰던 국교회의 후신 성공회에도 1980년에 순교자로 등록되었다. 그의 죽음이 양쪽 교회에서 모두 순교로 인정받는 것은 교리에 앞서는 ‘양심’의 권리에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다.

모어는 시대 변화의 중간에 서 있던 사람이다. 휴머니즘과 종교 신앙 사이를 연결한 사람이었다. 영국 역사학자 휴 트레버-로퍼의 논평이 이 연결성을 잘 보여준다. “(모어는) 휴머니스트 가운데 가장 거룩한 사람이며 성인 중에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식민지 획득으로 넓혀진 ‘꿈의 공간’

독일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인근의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동상. [사진 The Granger Collection, 위키피디아, freepik]

유토피아에 ‘없는 곳’이란 이름을 붙인 것도 중간 위치에서 나온 입장이다. 초월자의 도움 없이 인간의 능력과 노력으로 ‘좋은 곳’을 만드는 길을 바라보았지만,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하지 않았다. ‘없는 곳’에 대한 상상일 뿐이라고 했다.

모어 시대 이후 학문의 발달에 따라 인간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늘어나면서 유토피아는 ‘(인간의 힘으로 만드는) 좋은 곳’의 뜻이 되었다. 유토피아의 실현을 위한 노력은 신대륙의 식민지에서 종종 나타났다. 모어가 상상한 이상사회에도 식민을 위한 공간이 필요했다. 대항해시대를 통한 공간의 확장이 유토피아의 무대를 만들어주었다.

존 로크

1730년대 제임스 오글소프의 ‘조지아 실험’은 극단적 도덕주의로 눈길을 끈 사례였거니와, 그에 앞서 1660년대 캐롤라이나 식민지 설치 과정의 ‘그랜드 모델(Grand Model)’에도 유토피아의 꿈이 나타났다. 이 모델의 작성에 존 로크(1632~1704)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더욱 눈길을 끈다.

마르스크의 ‘공산당선언’ 초고. [사진 The Granger Collection, 위키피디아, freepik]

캐롤라이나 모델에는 정치조직의 합리성을 강조한 진보적 측면이 있었으나 귀족제와 노예제를 옹호하는 등 ‘봉건적’ 측면도 지적된다. 사회계약론으로 정치사상의 새 지평을 연 로크가 이 모델의 작성에서 맡은 역할에 대해 많은 논란이 일어난 것은 그 때문이다. 젊은 나이였던 로크의 역할이 실무자에 그쳤던 점도 있었겠지만, 국왕의 처형(1649)과 공화정 시도(1649~60)라는 정치실험 실패의 배경 위에서 이해할 일이기도 하다.

식민지 획득은 ‘착취의 공간’과 함께 ‘실험의 공간’도 만들어주었다. ‘없는 곳’에 만들어질 ‘좋은 곳’을 향한 모어의 꿈은 다음 시대의 이상주의자들에게 이어졌다. 유럽인의 식민활동은 인간사회의 모순을 여러 측면에서 심화시켰지만, 한편으로는 모순 극복의 새로운 길을 찾는 실험실이 되기도 했다.

유토피아의 귀착점이 된 사회주의

유토피아 사상은 19세기에 활짝 꽃을 피웠다. 알퐁스 드 라마르틴(1790~1869)은 “유토피아란 때를 아직 만나지 못한 진실”이라고 했고, 오스카 와일드(1854~1900)는 “진보란 유토피아의 실현을 위한 과정”이라고 했다. 자연과학과 정치사상의 발전에 힘입어 모어의 꿈이 이제 현실에 가까이 느껴지게 된 것이다.

유토피아 사상의 유행은 거꾸로 ‘유토피아’의 의미를 희화화하는 결과도 가져왔다. 엥겔스와 마르크스가 말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utopian socialism)’란 말이 그렇다. 이 말이 ‘공상적 사회주의’로 번역되는 것은 자기네 ‘과학적 사회주의’와 대비하여 종래의 사회주의를 깎아내렸다는 뜻이다.

두 사람은 ‘공산당선언’(1848)에 이렇게 썼다. “계급투쟁이 발전하지 못한 상황과 그들 자신이 처한 환경 때문에 (…) 그들은 사회 전체의 변화를 제창하면서 계급의 차이를 무시하려 든다. 아니, 지배계급을 오히려 두둔한다. (…) 그래서 모든 정치적 행동, 특히 혁명적 행동을 거부한다.”

앙리 드 생시몽

엥겔스와 마르크스 이전의 사회주의는 어떤 것이었나. 앙리 드 생시몽(1760~1825), 샤를 푸리에(1772~1837), 로버트 오언(1771~1858) 등이 알려져 있다. 그들의 주장 사이에도 상당한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공산당선언’의 지적대로 계급투쟁의 필연성을 부정한 것이 그들의 공통점이다. 그래서 ‘과학적’이지 못하고 ‘공상적’이라는 것이다.

샤를 푸리에

아메리카 독립과 프랑스대혁명 등 18세기 말의 정치적 격변이 새로운 조직원리를 통한 유토피아의 꿈을 키워주었다. 사유재산권의 토대인 ‘개인주의(individualism)’의 극복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그 꿈은 ‘사회주의(socialism)’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같은 취지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했다. 다만 그들은 사유재산권의 결과물인 자본계급과의 투쟁에 집중하는 노선을 ‘과학적 사회주의’로 내걸면서 자기네 꿈은 꿈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로버트 오언

인류에 대한 위협을 특정 계급의 악역보다 더 넓은 의미의 문명의 성격에서 찾게 된 21세기 상황에서, 표적을 좁히려 들던 ‘과학적’ 사회주의보다 밑바닥 원리를 탐구하던 ‘공상적’ 사회주의의 유산이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한 꿈, 유토피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개인주의 극복’이라는 과제를 다시 떠올려본다.

김기협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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