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유포리아
‘유포리아(Euphoria)’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다. 마약·성·범죄 등 일탈에 물든 10대 청소년들의 사랑과 우정을 적나라하게 다룬 히트작이다. 2019년 시즌1 방영 이후 ‘케이블 채널 HBO 내 시청자 수 역대 2위’ ‘2020년대 트위터 언급 1위’ 등의 기록을 세웠다. 동명의 이스라엘 드라마가 원작인데, 제목인 유포리아는 ‘행복감, 다행감’을 뜻하는 정신분석학 용어다.
전문가들은 마약이 주는 일시적 쾌락처럼 어딘가 불안하거나 어긋난 맥락에서의 인위적 행복감이 유포리아라고 설명한다. 미국정신분석학회는 유포리아를 ‘더 이상 자연적으로 생기지 않는 행복감이나 기쁨의 경험을 되찾으려는 시도로 인한 결과’로 정의했다. 시쳇말로 ‘뽕 맞은’ 기분. 유쾌하고 의기양양하지만, 결코 편안하고 자연스럽지 않은 환희가 바로 유포리아다.
최근에는 한국 정치에서 진영 극단주의 매몰을 비판하는 말로 유포리아가 쓰였다. 지난 9일 김재원 전 국민의힘 최고위원이 라디오 인터뷰에서 “김의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지층 환호로) 심리학에서 말하는 유포리아 상태에 가 있다”며 “엄청나게 의로운 투쟁을 하고 있다고 지금 뭔가 꿈속에서 헤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엮은 ‘청담동 술자리 의혹’이 허위로 드러났는데도, 의혹 제기자인 김의겸 의원이 사과는커녕 “계엄령 상태”를 운운한 걸 비판한 말이다.
유포리아의 끝은 뭘까. 경제학 이론이 힌트일 수 있다. 앞서 미국 경제학자 하이먼 필립 민스키(Hyman Philip Minsky)가 투기적 투자 거품과 금융 위기 간 상관관계를 설명하면서 유포리아 개념을 차용했다. 버블 붕괴 직전 가장 위험한 과열 순간에 사람들의 투기적 행복감이 절정에 달한다는 ‘민스키 모델’이다. 민스키는 ‘열광-탐욕’의 상승 곡선 끝에 광적 행복인 유포리아가 온다고 봤다.
이후 출렁이며 곤두박질치는 하락선 위에 ‘현실 부정-공포-좌절’을 차례로 배치했다. 10대 일탈이나 팬덤 정치의 후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방탄소년단(BTS) 정국은 솔로곡 ‘유포리아’ 말미에 ‘꿈을 건너서 수풀 너머로 선명해지는 그 곳으로 가’자고 노래했다. 유포리아 대신, 정상 행복을 뜻하는 ‘유사이미아(Euthymia)’가 절실한 때다.
심새롬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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