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회사 PC 비번을 잊었다…노인도 아닌데 찾아온 치매 [조기현의 살아내다]

조기현 2022. 12. 16.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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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치매는 65세 이상 노년만 걸릴 수 있는 질환이 아니다. 노년기에 접어들기 전 ‘초로기’에도 치매가 시작될 수 있는데 이를 초로기 치매라고 한다. 한국의 치매 환자 중 10% 정도를 차지한다. 아직 중년이기에 인지가 저하돼도 치매 진단을 받지 않는 경우를 포함하면 훨씬 더 많을 수 있다.
초로기에 치매가 시작되면, 한창 직장을 다니는 나이라 업무에 차질을 빚는다. 동료와 마찰이 생기고 상사의 질책을 받기도 한다. 심지어 출퇴근할 때 길을 잃는 경우도 많아지고, 교통사고를 일으키기도 한다. 크고 작은 사고는 결국 실직으로 이어진다. 더 이상 일을 못 해 소득이 없지만, 치매로 인한 의료비 지출은 늘어난다. 빈곤에 빠질 위험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치매가 시작된 당사자는 자존감이 낮아지고, 주변 지인들은 낯설어진 친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서서히 거리를 둔다. 그렇다고 갈 곳도 마땅치 않다. 돌봄 기관은 대부분 신체가 노쇠한 노년 치매 환자에게 맞춰져 있는 데다 인지 기능이 저하됐을 뿐 아직 팔다리에 힘이 넘치는 활달한 초로기 치매 환자에게 맞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다 입소해도 어르신들이 "젊은데 왜 이런 곳에 오냐"며 타박하는 경우도 있으니, 초로기 치매 환자는 몸도 마음도 오갈 곳이 없다. 사회적 관계가 위축되고 고립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이유다.
정기적으로 치매 가족을 돌보는 보호자들을 만나고 있다. 거기서 만난 조금순님은 초로기 치매 남편을 돌본다. 남편이 은퇴를 앞둔 시점에 치매가 찾아왔다. 토목감리를 하던 남편은 출퇴근길을 자주 잃어버렸다. 그래도 일을 그만둘 수는 없으니 처음엔 금순님이 동행하기도 하고, 휴대폰으로 길을 알려주면서 하루하루를 이어갔다. 하지만 일을 그만두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우리 남편이 사람들에게 잊히는 게 싫더라고요.”
일을 그만뒀어도 친목 모임이나 경조사를 열심히 다닌 이유였다. 남편이 속했던 모임 자리에 남편을 데려다주고 다른 곳에서 기다리다가 모임이 끝날 시간에 맞춰 남편과 함께 집에 오는 날이 여럿이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보다 잊히는 속도가 더 빨랐다. 어느 날 한 모임에서 남편이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고 멍하니 사람들만 쳐다보는 모습을 봤다. 남편이 마치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것 같았다. 모임을 열심히 다니는 게 다 부질없는 짓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하면 남편이 기억을 잃더라도 사람들은 남편을 잊지 않을 수 있을까?
또 다른 초로기 치매 남편을 돌보는 황경민님도 이런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직장에서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회사 컴퓨터에 로그인하는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전화 횟수가 늘어나더니, 시말서를 쓰는 날도 더러 생겼다. 남편은 직장을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일상적 업무를 수행하지 못했지만 아직 50대 초반이었기에 치매라는 말은 떠올리지 못했다. 그저 우울증이나 건망증이라고 여겼다. 그게 아니면 남성의 갱년기 증상인가 싶기도 했다. 여러 병원을 전전한 끝에 치매 진단을 겨우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남편은 퇴직했다. 당장 소득이 아예 없어졌다. 아직 집 대출금과 자동차 할부금이 남아있었고, 대학생·고등학생인 세 아이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눈앞이 깜깜했다. 당장 아무 일이나 해야 했지만, 진단을 받고 1년쯤은 깊은 우울감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다. 남편이 치매를 앓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치매가 있어도 잘 살아갈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17세기 이탈리아 화가 구에르치노의 'Saint Matthew and the Angel' (1622)

“남편이 치매 걸렸는데 내가 웃고 떠들고 있으면 사람들이 나를 이해 못 할 것 같았고,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기더라고요.”
동굴 속에 숨어 들어가듯이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치매가 마치 전염병이라도 되는 듯이 멀리하려는 지인들 모습에 상처를 입었고, 젊은데 치매가 걸린 이유를 악의적으로 추측하는 친척들의 대화에 상처는 더 곪아만 갔다. 젊은 나이에 치매가 시작돼도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아무도 지지하지도, 함께 답을 찾으려고 하지도 않는 이 질문에 답을 찾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금순님과 경민님이 만난 자조 모임에서 그 답을 찾았다. 그곳에서는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속마음을 나눌 수 있었다. 치매를 받아들이기까지의 혼란, 실제로 돌봄 상황에서 마주하는 어려움, 의료나 복지 절차에서 겪는 문제, 세상에서 겪는 차별까지 이전에는 ‘말’이 되지 못했던 경험이 자조 모임에서는 비로소 ‘말’이 됐다. 서로의 말이 서로의 삶의 결을 고운 빗으로 빗겨주는 것처럼 위안이 됐다.
지금 경민님의 남편은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지낸다. 일자리를 얻고, 공동체 안에서 그의 역할이 생겼기 때문이다. 인천시치매광역센터 부설기관인 ‘뇌건강학교’는 그의 학교이자 일터다. 초로기 치매 환자에 맞춘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하고, 일주일에 한 번 3시간씩 카페에서 차를 내리고 청소를 한다. 또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가치 함께 사진관’이라는 행사에 보조 인력으로 함께 하기도 한다. 가치 함께 사진관은 사진사 출신인 초로기 치매 환자가 직접 사진을 찍어주는 행사로, 다른 초로기 치매 환자는 사진 인쇄와 액자 구성을 돕는다. 그렇게 해서 월 10만원 정도의 수입이 생긴다. 적은 돈이지만 공동체 안에서 역할을 해내 받은 돈이기에 보람이 크다. 무엇보다 남편에게 활기가 생겼고, 표정의 밝기부터 달라졌다고 한다. 이런 상호작용이 삶의 질을 높이고, 치매의 악화도 지연시킬 수 있다. 인지가 저하될 뿐 몸과 마음은 아직 하고 싶은 활동들이 많다. 제대로 된 일자리로 만들어볼 수 없을까?
실제로 치매 일자리 사업을 제대로 시행하는 곳이 있다. 시흥시치매안심센터에서는 초로기 치매 당사자 3명이 노동자가 돼서 센터 행사나 관리 업무를 함께 한다. 일일 행사를 넘어 지역공동체 일자리이기에, 주 5일 출근한다. 근무시간은 주 30시간 이내로, 최저시급에 간식비까지 포함해서 월 150만원 내외의 임금을 받는다. 초로기 치매 당사자가 자신이 지내는 동네에 치매 인식을 높이는 활동을 하기도 하고, 다른 치매 어르신을 돕는 활동을 하기도 한다. 매일 아침 출근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데서 자존감이 샘솟고, 주어진 업무를 수행하면서 근력과 인지력이 향상된다. 일하는 도중에 누군가 기억을 잃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 먼저 도와주면 그만이다. 서로가 힘을 합쳐서 실수 없이 하루를 보내고 퇴근하는 날의 보람의 크기는 말도 다할 수 없다.
치매여도 투명인간이 되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갖고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기. 어쩌면 초로기 치매뿐 아니라 경증 치매 환자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한국의 빠른 고령화 속도는 단지 국가의 인구 문제일 뿐 아니라, 우리 일상이 크게 변한다는 걸 말해준다. 고령자가 많아지면 인지가 저하되는 상황을 일상적으로 마주할 확률이 높아진다. 우리 모두 치매 환자나 치매 가족이 될 수 있다. 치매와 잘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하는 건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고민이다.

조기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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