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떠나라” 日 혐한에 ‘증오극복’ 싹 틔운 재일 한인들

조민영 2022. 12. 13.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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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발전소, 댓글창④ 혐오에 맞서는 나라들
日 우토로 평화기념관 김수환 부관장
극우단체 상대 소송 이끈 이신혜씨
혐한 일본인이 불을 질러 까맣게 불타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일본 교토 우토로 마을의 한 주택. 우토로는 일제강점기 비행장 건설에 동원됐다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조선인들이 모여 살아 온 마을이다. 우토로평화기념관 제공


“다른 민족이나 인종에 대한 부당한 차별과 증오를 어떻게 해소하고 극복해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 것인가.” 일본 아사히신문이 지난 8월 31일 사설에서 조선인 마을에 방화를 저지른 23세 남성에게 징역 4년이 선고된 판결을 다루며 던진 질문이다. 이 청년은 온라인에서 본 재일 한국인에 대한 가짜뉴스를 확신해 ‘혐한(嫌韓)’에 빠졌다. 일본의 주요 언론이 사설을 통해 이를 언급한 건 이 사건이 일본 사회 내 가장 공고한 혐오를 보여준 일이었기 때문이다. 온라인을 통해 세상을 접하고 배우는 10·20대에게 온라인상의 혐오 정보가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줬을 뿐 아니라 혐오가 실질적인 위협이 될 수 있음을 확인시킨 사건이었다. 이처럼 강한 혐오에 대해 일본 사회에서 무엇보다 혐오의 대상이 된 재일 한국인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혐오는 무지·방치한 사회의 문제…만나지 않으면 알 수 없어”

지난달 28~30일 일본 현지를 찾아 혐오사회를 넘어서기 위해 애쓰는 이들을 만났다. 예상과 달리 이들의 시선은 분노나 좌절보다 희망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방화사건이 벌어진 우토로마을에 건립된 ‘우토로 평화기념관’이 대표적인 사례다. 우토로는 1940년대 초반 일제 강점기 비행장 건설에 동원된 1300여명의 조선인이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남아 살기 시작한 일본 교토 외곽에 있는 마을이다. 기념관은 ‘조선인 부락민 마을’로 차별받아 오면서도 연대하고 투쟁하며 살아온 마을의 역사를 기록하고 알리기 위해 한·일 시민단체가 한국 정부 지원을 받아 지난 4월 개관했다.
지난 4월 개관한 우토로 평화기념관에서 만난 김수환 부관장이 기념관 건설 배경과 일본 내 혐한 움직임을 이겨내기 위한 노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우토로=조민영 기자


이곳에서 만난 김수환 평화기념관 부관장(46)은 지난해 8월 방화사건 이후 충격과 상처 가운데서도 평화기념관 건립이 예정대로 진행된 것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혐오발언과 혐오범죄의 가장 큰 폐해는 피해자를 위축시키는 것”이라며 “이 지역이 혐오의 대상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앞으로 더 힘들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방화범이 건립 중인 기념관을 타깃으로 했기 때문에 (주민들이) 기념관 건립을 기피하게 될 수도 있었다”면서 “그러나 주민들이 오히려 역사를 알릴 기념관을 잘 만들어야 한다면서 등을 밀었다”고 했다.

방화사건의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징역 4년이라는 비교적 높은 형량을 받게 된 것도 ‘혐오 피해’ 당사자들이 적극 호소했기 때문이다. 실제 법원은 혐오·차별 범죄에 따른 가중처벌이라고 명확히 언급하진 않았지만 ‘편견과 혐오감정에 의한 범죄’ ‘폭력적인 방법으로 배타심을 고취시키는 행위’라며 형사책임이 무겁다고 밝혔다. 김 부관장은 “이런 경험이 정말 중요하다. 혐오를 넘어설 수 있는 힘이 되기 때문”이라면서 “방화사건이 있었으니 숨거나 더 대치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만나 대화하고 연대해야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4월 개관한 우토로 평화기념관과 이 지역 조선인들이 실제 살았던 함바집 재현 건물(오른쪽 앞). 기념관은 1940년대 일제 치하에서 비행장 건설에 동원됐다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조선인들이 모여 살아 온 우토로마을이 겪은 차별과 투쟁의 역사를 기록하고 미래에 전하기 위해 남를 기록하기 위해 한, 일 양국 시민단체와 한국 정부 지원을 받아 건립됐다. 교토=조민영 기자


혐오 대상이 됐던 이 지역의 한 어르신은 “그렇게 우리가 미우면 한번 와서 얘기라도 해보지. 그랬으면 안 그랬을 텐데”라며 온라인에서 잘못된 정보에 빠져 범행에 이른 방화범을 오히려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김 부관장은 “혐오가 어떤 개인의 잘못과 피해가 아니라 교류하지 못하고 나누지 못한 사회의 문제라는 얘기”라면서 “일본 내에서 혐한에 동조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 중 누가 많을 것 같냐는 질문을 받는데, 사실 관심 없고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더 열심히 알리고 교류해야 한다”고 말했다.

평화기념관은 개관한 지 8개월차에 접어들었다. 김 부관장은 “방문객이 8500명을 넘어섰는데 거의 다 일본인”이라면서 “방화사건을 계기로 현실을 바로 알자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니 희망이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강조했다.

“당당해지는 혐오, 그냥 두면 퍼져…싸움에 나섰다”

재일동포 2.5세 프리랜서 작가인 이신혜씨가 지난달 29일 일본 오사카 코리아NGO센터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이씨는 자신과 재일조선인에 대한 혐오발언을 계속해 온 일본 극우단체 재특회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해 왔다. 이씨는 법정에 나갈 때마다 제작해 입었던 한복들을 직접 가져와 각 디자인의 의미와 배경 등을 소개했다. 오사카=조민영 기자

재일동포 2.5세 프리랜서 기자 이신혜(51)씨는 일본 내 대표적인 극우·혐한 단체인 재특회(재일한인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모임)를 상대로 정면 승부해 최종 승소 판정을 받아낸 인물이다.

그는 2013년 ‘조선인은 다 싫다. 죽이자’ 등의 발언을 공공연히 하는 재특회의 행태 등을 비판하는 기사들을 온라인으로 내보냈다. 당시 한 일본 여중생이 한인타운이 있는 오사카시 쓰루하시역 앞에서 “한국인이 너무 싫다”며 대학살까지 운운하는 대중 연설을 비롯한 충격적인 영상이 퍼지던 때였다. 그러자 재특회는 이씨를 표적 삼아 온갖 혐오발언을 쏟아내며 공격했다. 위안부 사건까지 엮어 모욕하는 발언도 이어졌다.

재일동포 2.5세 프리랜서 작가인 이신혜씨가 법정에 나갈 때마다 제작해 입었던 한복들을 직접 가져와 각 디자인의 의미와 배경 등을 소개하고 있다. 오사카=조민영 기자


이씨는 “조선인이면서 여성인 나를 향한 전형적인 차별과 혐오”라며 “이것을 참고 가만히 있게 되면 다음세대에도 계속되리란 생각이 들었다. (혐오의 대상이) 참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시작한 소송전은 2014년 8월부터 꼬박 4년이 걸렸다. 개인이 혐오 단체를 상대로 싸우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씨는 거식증에 걸리는 등 힘들었지만 많은 이들이 응원하며 함께해준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결국 2017년에 이어 2018년 재일동포와 여성을 향한 ‘복합차별’을 당했다는 피해를 공식 인정한 배상 판결이 연달아 확정됐다.

그는 “배상금이 너무 적어서”라고 웃으면서도 “혐오를 혐오라고, 차별을 차별이라고 말하고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인식이 생긴다고 본다”고 했다. 아직 가야 할 길은 멀다. 이씨를 공격한 극우단체는 여전히 존재하고 온라인을 통한 혐오도 계속된다. 이씨는 “과거 해당 사이트엔 구글 광고가 많았는데, 혐오 행위로 판결받았다고 구글에 알리며 광고하지 말라고 촉구하니 많이 줄었다”면서 “혐오행위를 당당히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사카·교토=조민영 기자 my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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