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집 <지영>, 위태로운 이야기를 일상 목소리로 들려줘"

윤성효 2022. 12. 13.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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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봄 생 마감한 지영 작가 만화 모은 책... 성 노동자의 이야기를 풀어낸 작품

[윤성효 기자]

 만화집 <지영> 일부.
ⓒ 주로출판사
 
"(..._ 많이 여위고 초췌해진 그분과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할 말이 많은 듯, 아님 아무 할 말이 없는 듯 무덤덤한 표정으로 책 한 권을 슬며시 내밀었다. 붉은색 양장 표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제법 두툼한 책이었다.

먼저 간 딸이 책 한 권을 남겼다고 했다. 가만가만 얘기를 듣던 나는 억장이 무너져 내렸고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속절없이 눈물만 흘렀다."

여태훈 경남 진주문고 대표가 사회관계망서비스에 "특별한 책 한 권 소개합니다"라며 쓴 글이다. 여 대표가 소개한 책은 만화집 <지영>(주로출판사 간)이다.

이반지하 작가는 추천사에서 "참으로 위태로운 이야기들을 전례 없이 선명하고 일상적인 목소리로 들려주었다"고 소개했다.

이 만화집은 지영 작가가 인터넷 플랫폼 '포스타입'에 성 노동자 '지영'에 관해 연재했던 만화를 모은 책이다. 지영 작가의 진짜 이름은 지영이 아니었고, 지영 작가는 지난 봄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해 현재는 이 세상에 없다.

지영 작가가 성 판매 여성의 일상을 담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만화를 남겼고, 출판사가 책으로 내놓은 것이다. 책은 한정판 고급 양장본으로 제작됐다.

만화집 목차는 '조건만남', '모던바', '키스방', '호스트바', '토닥이 체험기', '낙비못만', '새 아저씨', '이전의 이야기', '나랑 살자고', '낚시 이야기'로 구성됐다.

작가는 '조건만남'에서 "지영이는 지영이의 진짜 이름이 아니다"라 했고, '모던바'에서는 "홀복을 입고 구두를 신고 현금을 들고 길거리를 활보하는 여자, 나는 술집여자다"라고 했다.

또 작가가 "아이고 지영아! 너한테 돈도 벌어다 주고 너를 가지고 싶어 하고 너의 말을 들어주고 너도 그의 말이 듣고 싶은 그런 좋은 인간이 너에게 생길 리가 없잖아!"라고 한 대목이 나온다.

작가는 '키스방'에서 "어떤 장소에서 뭔가를 했고 누군가를 만났지만,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그것들은 모두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내가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가 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다"라고 했다.

'호스트바'에서 작가는 "노래를 부르는 동안 사장 언니의 가슴은 계속 출렁거렸습니다. 그건 감동이었습니다. 이 컴컴한 호스트바 안에서 언니가 최고로 빛났습니다"라고 했다.

'낚시 이야기' 편에서 작가는 "고기가 잘 안 잡힐 때도 있고 잘 잡힐 때도 있다. 내가 고기를 잡아서 올리면 아빠는 자기는 못 잡으니까 조급해하면서도 우와 크다, 잘 잡는다, 이렇게 외친다. 아빠가 그럴 때마다 무척 마음이 아프다. 아빠도 얼른 고기를 잡았으면 좋겠다. 아빠가 나보다 낚시를 더 잘했으면 좋겠다. 나보다 낚시를 못하는 아빠를 생각하면 나는 견딜 수 없이 슬퍼진다"라고 했다.

이반지하 작가는 추천사에서 "'창녀.' 이 사회에서 이보다 더 정확하고 통렬하게 그들을, 또 우리를 지칭하며 갈라버리는 말이 있을까. 순식간에 공기를 멈추게 하고 파열시키는, 넌더리 날 정도로 비천하고 선정적인 말. 혐오하는 쪽도 지지하는 쪽도 파르르 불같이 일어나게 하는 격렬한 말. 나는 그 말이 존재가 된 작품을 만났다. 그 목소리와 형태를 보자마자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이어 "그가 그려내는 선처럼 세상을 쓱쓱 그어버리는 소리가 들리는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보고 싶었다. 내년과 내후년, 그리고 지금보다 몇 배의 나이가 된 그가 풀어내 줄 이야기도 일찍부터 조마조마 내 멋대로 기다렸다"며 "그러니까, '지영'이라는 생면부지의 예술가가 기꺼이 나와 함께 나이 들어줄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을 했다는 말이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지영은 참으로 위태로운 이야기들을 전례 없이 선명하고 일상적인 목소리로 들려주는 작가였다. 하지만 그의 뛰어난 작가적 능력은 작품에만 국한돼 있지 않았다. 그는 작품만큼 위태로웠을 자신의 존재적 흔들림을 나를 포함한 독자들의 시야에서 효과적으로 지워낼 줄도 아는 작가였다"며 "그래서 나는 지영을 만화를 정말 잘 그렸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싶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정말 잘 그리는 작가였다. 그는 언제나 정말 잘 그리는 작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이연숙(리타) 시각문화비평가는 "'지영이는 지영이의 진짜 이름이 아니다'로 시작하는 <지영>의 명랑한 거짓말은 현실의 중력을 가뿐히 초과한다. 단순하고 사랑스러운 <지영>의 그림체는 현실과 현실 아닌 것을 훌쩍 오갈 만큼 가벼우며, 무거운 침묵과 발랄한 폭소를 함께 담을 수 있을 만큼 탄성이 좋다"고 했다.

그는 "그처럼 귀여운 표정을 하고서, <지영>은 정확히 세상을, 당신을 배반하는 방식으로만 '여성'이자 '성 노동자'로서의 경험을 말한다. <지영>은 사랑과 미움, 기쁨과 고통이 동시에 존재하는 세상의 아이러니를 온몸과 온 마음으로 껴안으며, 독보적인 '소수자의 자기 말하기'를 보여준다"며 "어떻게 이렇게 놀라운 작품이 우리 앞에 왔을까? <지영>을 읽으며 나는 내가 바로 이것을 오랫동안 기다려왔음을 알아본다"고 했다.

여태훈 대표는 "먼저 간 그를 진심으로 추모하고 남은 분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같이해야겠기에 우리 이웃 우리 작가 코너에 모셨다"고 했다.
 
 만화집 <지영> 표지.
ⓒ 주로출판사
  
 만화집 <지영> 일부.
ⓒ 주로출판사
  
 만화집 <지영> 일부.
ⓒ 주로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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