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만에 다시 찾은 이 은행나무, 무엇이 변했나 [중앙선 역사문화기행]
[최서우 기자]
양평에서 가장 높은 해발 1157m의 용문산. 경기도에서 네 번째로 높은 곳 아래에는 산과 이름이 같은 용문사와 천 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자리 잡고 있다. 천 년 고목답게 높이는 42m, 뿌리 부분 둘레가 약 15.2m인데, 사찰보다는 은행나무가 오히려 명성이 높아 가을만 되면 고목과 함께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용문사도 원래는 천 년이 넘은 역사가 있는 걸로 추정하고 있지만, 영주 부석사와 달리 고려 시대부터 이어진 건물은 없다. 조선 초기에도 용문사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몇 백 년의 세월이 지난 후 정약용은 절의 쇠락함을 안타까워했다. 게다가 구한말에는 인근 지평면처럼 의병이 이곳에서 항쟁한 것 때문에 일제가 절을 불태워버리는 만행을 저질렀고, 6.25 전쟁 때 용문산 전투로 또 불타 1980년대가 되어서야 간신히 모습을 찾았다.
고된 시련을 몸소 경험한 천년 은행나무가 있는 양평 용문사로 가보자.
용문사 은행나무
서울과 경기 북부권에서 용문사는 주말에 외곽으로 나들이 가기 좋은 곳이다. 경의중앙선을 타고 용문역에서 내린 다음 옛 용문터미널로 나와 용문사행 버스로 환승하면 된다(다만 매월 5, 10, 15, 20, 25, 30일은 용문 장날이니 용문버스터미널까지 걸어가야 한다.). 버스는 30분 간격으로 있고, 용문사까지 20분 정도 걸린다.
충청, 영남이나 호남에서 출발한다면, 중부내륙고속도로 남양평 나들목에서 양평읍내를 거친 다음, 6번 국도를 타고 마룡 교차로까지 가자. 이후 341번 지방도를 따라 조현 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용문천을 따라 직진해 쭉 올라가면 된다.
▲ 용문산 관광지에서 눈에 띈 시비. 용문 주민이었던 겸재 양창석의 용문팔경이라는 시다. 용문산 주변 8가지 절경을 노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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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서 이항로와 제자들 그리고 양평 정미의병의 항일정신이 담겨 있는 기념비들. 이항로의 고향은 옛 양근군 서종면(오늘날 양평군 서종면)이다. 2015년에 기념비들을 세웠다. |
ⓒ 최서우 |
양쪽 기둥마다 용머리가 있는 일주문이 용문사로 들어가는 길임을 알려준다. 일주문에서 한 15분 남짓 걸었나. 오른편으로 나를 정화시켜 줄 사천왕문이 용문사에 다 왔음을 알려준다. 사천왕의 인도를 받고 계단을 계속 올라가면 왼편으로 커다란 고목 한 그루가 보인다.
▲ 낙엽을 벗고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천년고목이자 천연기념물 제30호 용문사 은행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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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보니 마치 오랫동안 시련을 많이 겪은 연로하신 어르신을 모시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은행나무가 기억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용문사 경내로 발길을 향했다.
용문사 이야기
그럼 용문사가 언제 처음 지어졌을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봉은본말사지>에 의하면 신라 신덕왕 2년(913) 대경대사가 처음으로 지었다고 한다. 혹은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이곳에 친히 행차하여 손수 나무를 심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선시대 초기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용문사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용문사(龍門寺): 미지산에 있다. 산을 용문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 절 때문이다. 절에 이색의 대장전기(大藏殿記)가 있다.
▲ 용문사 경내 |
ⓒ 최서우 |
용문산의 옛 이름은 미지산. 미지는 용의 순우리말인 '미르'로 추정하고 있다. 이색에 대장전기에는 우왕 4년(1378) 정지국사 지천이 개풍 경천사의 구씨원각대장경을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오늘날 남아있지 않다).
정지국사 지천이라. 그는 무학대사와 함께 공민왕 시절 원나라에서 유학했다. 두 승려 모두 인도에서 온 지공대사와, 그의 제자이자 고려인이었던 나옹선사의 제자가 되었다. 고려로 돌아온 뒤 동기인 무학대사는 태조 이성계와 친분을 쌓아 출세의 길을 걸었지만, 지천은 정반대로 자취를 감추고 수행에만 힘썼다.
이후 천마산 적멸암에서 입적하였는데, 화장을 하니 어마어마한 사리가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나라에서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지혜라는 의미를 가진 '정지(正智)'라는 시호를 태조가 내렸다고 한다. 실제 그를 기념한 승탑과 비(보물 제531호)가 용문사 북동쪽 야트막한 산에 있는데, 그의 생애가 적힌 비석은 보존처리를 위해 특수한 천으로 덮여 있었다.
▲ 보물 제531호 정지국사탑 및 비. 탑몸이 팔각으로 이뤄진 승탑이다. |
ⓒ 최서우 |
▲ 보물 제1790호 양평 용문사 금동 관음보살 좌상. 고려 후기에 유행한 금동보살상의 형태를 띄고 있다. |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하지만 태종 이후 숭유억불 기조가 강화된 후, 용문사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조선 후기 용문사를 찾은 정약용의 시구를 보면, 화려했던 고려시대의 위용이 사그라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용문의 보찰이 폐허에 버려져 있어라 / 龍門寶刹委殘墟
객이 이르니 빈 산에 목탁 소리만 들리네 / 客到山空響木魚
옛 전각엔 평중의 잎새¹⁾가 누렇게 비추고 / 古殿照黃平仲葉
황량한 대엔 무후의 채소²⁾가 새파랗구려 / 荒臺寒碧武侯蔬
세조가 하사한 것은 은주발이 남아 있고 / 光陵內賜餘銀盌
고려의 불교 문화는 옥섬돌에 보이누나 / 麗代宗風見玉除
어찌하면 처자식의 거리낌을 털어 버리고 / 安得擺開妻子戀
설천에 눌러앉아 성인의 글을 읽을거나 / 雪天留讀聖人書
주1) 평중의 잎새: 평중은 은행나무의 또다른 이름이다.
주2) 무후의 채소: 무후는 삼국시대 촉 나라 승상 제갈량을 뜻한다. 위나라 북벌 중 장기전에 돌입할 때 제갈량이 병사들에게 순무를 심을 것을 지시했다. 이로 인해 순무를 제갈채로 부르기도 한다.
▲ 용문사 대웅전 |
ⓒ 최서우 |
▲ 용문사 지장전. 대웅전과 지장전을 포함한 대다수 건물들은 1982년 주지였던 선길스님의 주도 하에 중건되었다. |
ⓒ 최서우 |
양평의 고찰 용문사와 천연기념물인 은행나무. 가을철이 되면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와 은행잎으로 가득한 고목을 사진에 담는다. 처음 고목을 볼 때는 그의 위용에 반하지만, 그 위용 뒤편으로는 조선 시대의 용문사의 쇠락, 일제의 만행과 한국전쟁의 시련이라는 주름이 자리 잡고 있다. 자신만 간신히 살아남고 함께 있던 건물이 불탄 모습을 본 고목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 부처의 자비와 과학의 힘은 용문사와 은행나무의 영원한 수호자가 될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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