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양보할 수 없는 욕실에 관한 Yes or No

류가영 2022. 12. 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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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연말, 누구보다 느긋한 목욕을 즐길 꿈에 부풀어 있다면 너무 오버일까?

욕실만 보면 그 호텔에 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인테리어에서 느껴지는 스타일과 감각, 청결에 대한 태도, 사용자 편의에 대한 세심함의 정도, 어메니티에서 읽히는 환경 의식 수준까지, 로비가 아닌 욕실이야말로 나에겐 호텔의 얼굴처럼 느껴진다. 단지 욕실 때문에 호텔에 대한 평가가 180도 바뀐 적도 수두룩하다. 완벽한 길이와 너비의 욕조와 스마트폰과 와인 잔을 꼭 맞게 거치하도록 재단된 욕조 선반을 만나면 넷플릭스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 객실이라도 크게 아쉽지 않았다. 반대로 초호화 부대시설로 기선을 제압한 호텔에서 순전히 편의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욕실을 마주한 아쉬움은 재방문을 꺼리게 했다. 게다가 아이가 생긴 이후로 호텔 욕실이 내게 선사해 주는 평화와 안식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은근슬쩍 자리를 비울 성싶으면 금세 양다리를 붙잡고 매달리는 두 아이를 피해 나에게 유일한 해방감을 느끼게 해주는 공간이니까(그러니 문 없는 욕실은 극구 사양한다!). 하지만 근사한 욕실 때문에 매번 스위트룸을 고집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수많은 호텔을 방문하며 쌓인 경험치를 토대로 난 욕실에 대한 나만의 원칙을 정리하게 됐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건 욕조다. 욕조가 없는 아름다운 욕실을 보면 나는 금세 서글퍼진다. 객실 정보란에서 ‘욕조 혹은 샤워 부스’라는 글을 보면 요청사항에 ‘욕조 있는 방으로 부탁합니다’라고 적어놓고도 불안하고, 욕조 대신 각광받는 샤워 부스를 볼 때마다 씁쓸하다(물론 협소한 욕실을 똑똑하게 활용하기 위한 방편으로는 어쩔 수 없지만). 분명 나는 살기 위해 씻는 전형적인 영국인과는 거리가 멀다. 여유만 있다면 언제나 샤워 대신 목욕을 선택할 테니까. 체크아웃할 때까지 욕조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는 사람도 꽤 많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욕조를 마치 다 쓴 수건이나 젖은 수영복을 던져두는 커다란 ‘통’처럼 여기는 사람들. 널찍한 욕실을 보면 설레기는커녕 ‘우리 집 거실보다 크다’며 고개를 절레절레하는 사람들 말이다. 우리 엄마는 샤워 캡을 머리가 아니라 남은 음식이 담긴 접시를 덮어두는 용도로 쓴다. 이국적인 향취를 내뿜는 샤워 젤은 엄마의 투숙 기간 내내 똑같은 자리에 머물 뿐. 남편에게 욕조는 해바라기 샤워기나 윤기가 흐르는 새틴 목욕 가운처럼 ‘과한’ 처사로 느껴진단다. 고백하겠다. 우리 집에서 백조 형태로 접힌 수건이나 욕조에 띄워놓은 장미 꽃잎, 수줍게 놓인 입욕제에 부풀어 오르는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사실을. 그런 욕실과 만나면 난 ‘이곳에서 근사한 하루를 보내길 바랍니다’라는 호텔 측의 다정한 쪽지를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동시에 호캉스에 대한 기대치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

하지만 욕조보다 중요한 건 깨끗하고 기능적인 욕실 설비다. 세면대와 변기, 샤워기와 비데는 믿음직스럽게 작동해야 하고, 샤워할 때마다 두 눈을 질끈 감게 만드는 녹슨 샤워 헤드와 곰팡이 낀 타일은 최대한 멀리하고 싶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난 화장실 변기가 깨져 있던 니스의 어느 오래된 호텔에서 막 돌아온 참이다. ‘기능적이지 못한 화장실’을 이유로 친한 친구 몇 명에게 다녀온 호텔을 ‘비추’하자 웬걸, 나 정도는 애교였다. 친구 중 한 명은 최고의 허니문 리조트라길래 방문한 어느 호텔 스위트룸 욕실에서 난데없는 접착 테이프 테러를 당해 맨발로 욕실을 이용할 수 없었고, 또 다른 친구는 화장실 휴지통을 툭 건드렸더니 다 쓴 콘돔이 모습을 드러낸 불쾌한 일화를 들려줬다. 수도꼭지를 틀 때마다 엉뚱한 곳에 녹물이 솟구치던 일, 담배 연기로 누렇게 뜬 천장과 변기 시트 아래 양동이만 덩그러니 놔둔 필리핀의 ‘무늬만’ 변기 등 최악의 욕실에 대한 친구들의 농담 같은 이야기는 멈출 줄 몰랐다. 사진으로 본 흔치 않은 목재 바닥이 마음에 들었던 어느 호텔의 욕실에서 시시때때로 쥐며느리의 습격을 받았다는 베스트 프렌드의 일화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심지어 욕실이 침대 바로 옆에 있어 자는 동안에도 불안에 떨어야 했다는데…. 한 일간지에서 ‘최악의 호텔’로 꼽기도 한 그 호텔에 당최 왜 묵기로 결심한 것인지 친구의 무심함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그러니 아름다운 욕실이 선사하는 황홀함은 얼마나 소중한지! 평소 사진을 잘 찍지 않는 나조차 화장실 셀카에 도전하도록 만드는 우아한 인테리어와 아늑한 조명을 앞세운 욕실 말이다. 팬데믹 이후 밀려든 업무와 육아로 연말 여행 계획은 시작도 못하고 있지만, 여유로운 목욕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는 신상 호텔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워케이션을 해서라도 당장 ‘예약’ 버튼을 누르고 싶다. 유리 천장으로 쏟아지는 캘리포니아의 햇살 아래 료칸 스타일의 목욕을 즐길 수 있는 말리부의 노부 료칸(Nobu Ryokan), 인테리어 디자이너 마르틴 브루드니츠키가 디자인한 알록달록한 욕실이 반겨주는 코펜하겐의 25아워스 호텔(25hours Hotel), 런던의 스카이라인을 바라보며 ‘센치’하게 거품 목욕을 즐길 수 있는 런던의 더 스탠더드(The Standard)까지.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호텔 욕실은 작은 창문을 열면 침대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는 연인과 수다를 떨 수 있도록 설계한 미국 샌타모니카의 셔터스 온 더 비치(Shutters on the Beach)와 국립해양생물보호구역인 캘리포니아 빅 서의 풍광을 감상하며 목욕을 즐길 수 있었던 알릴라 벤타나(Alila Ventana)였다. 두 곳 모두 내가 묵어본 가장 비싼 호텔로, 근사한 욕실은 거저 누리기 힘든 호사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하지만 어떤 집에도 잘 어울리는 콜러의 욕조와 런던의 멤버십 클럽 소호 하우스가 유행시킨 보디 케어 브랜드 카우쉐드 제품은 충분히 좋은 것들이다. 보스턴의 옴니 파커 하우스(Omni Parker House)나 몰디브의 아난타라 날라두(Anantara Naladhu), 황금 백조 모양의 수도꼭지가 시그너처인 리츠 파리(Ritz Paris)의 군더더기 없는 욕실에서는 언제나 한결같은 안식을 기대할 수 있다. 몇 해 전, 큰맘 먹고 침실 한쪽에 이동식 욕조를 설치하며 나는 ‘기본’을 만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작은 욕실 하나에 얼마나 정교한 미감과 기술이 결집돼 있는지! 온갖 설비를 뜯어낸 뒤 화장실 배관을 침실까지 끌어오는 작업의 복잡성은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이후 호캉스의 빈도는 줄고, 삶의 질은 높아졌다. 거대한 텔레비전과 AI 스피커를 갖춘 최첨단 욕실이라든지 목욕으로 누릴 수 있는 호사를 별도의 스파나 사우나 시설을 통해 확장시킨 호텔이 점점 늘고 있지만, 미안하게도 나에게 그 정도의 럭셔리는 그다지 솔깃하지 않다. 그저 편하게 몸을 누이고 내 멋대로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작은 안식처 정도면 충분할 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목욕을 즐겨라”라고 조언한 영국 왕 조지 5세와 향유로 목욕하기를 즐겼던 클레오파트라, ‘목욕 때문에 망했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온천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로마인 등 온갖 호화를 누리던 사람들이 그 어떤 곳보다 자신만의 욕실을 사랑했듯 나만의 화장실이야말로 궁극의 럭셔리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판도라 사익스는 영국의 패션 스타일리스트이자 저널리스트, 방송인이다. 〈선데이 타임스〉 〈가디언〉 〈엘르〉 〈GQ〉 등 다양한 매체에 일상에 대한 솔직하고 유쾌한 이야기를 기고해 왔다. 윤리적 소비에 대한 책 〈How Do We Know We’re Doing It Right? And Other Thoughts on Modern Life〉에 이어 최근 신간 〈What Writers Read: 35 Writers on Their Favourite Book〉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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