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권의 감성골프] 그린에 털썩 주저앉은 동반자

2022. 12. 9.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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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으로 휜 코스에서 멋지게 티샷을 했는데 막상 가보니 공이 보이지 않았다.

코스 오른쪽 가장자리에 풀과 관목이 밀집해 찾기가 쉽지 않았다. 편먹기로 내기를 했는데 7번 홀까지 한 번도 상금을 챙기지 못해 마음이 상해 있었다.

희한하게 홀마다 스코어가 좋지 않은 동반자와 편을 먹어 혼자만 상금 제로였다. 가까스로 마음을 붙잡고 있는데 공까지 보이지 않아 속으로 끓고 있었다.

한 동반자가 가까이 와서 진지하게 공을 찾는 데 동참했다. 경기 진행 관계로 결국 분실구로 처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때 동반자가 유명 브랜드 새 공을 나에게 말없이 건네주고 자기 위치로 갔다. 그 고마움에 막 올라오려던 밑바닥 감정이 눈처럼 녹았다.

스코어만 좋다고 기분 좋은 게 아니다. 극한 상황에서도 진실된 위로에 안정을 찾는다. 내가 존중받는다는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얼마전 남양주 골프장에서 동반자가 연속 4퍼트를 범해 멘털 붕괴 직전이었다. 레귤러 온을 시켜 버디나 파는 고사하고 최소 보기를 해야 함에도 더블 보기를 일삼으니 열이 받을 대로 받았다.

홀을 가까스로 비껴나간 공을 주워 그린에 털썩 주저앉은 동반자 등을 토닥거리며 일으켜 세웠다. 가벼운 스킨스 게임이어서 다음 홀에서는 살짝 애매한 거리였지만 컨시드를 줬다.

그는 후반 들어 평소 기량을 찾아 즐겁게 라운드를 마쳤다. 결정적인 순간에 감사했다면서 그가 저녁을 샀다.

어렵사리 경기를 이어가고 있을 때 동반자가 던지는 격려 한마디에 큰 위로를 받는다. 연속 OB(Out of bounds)를 내고 불규칙한 샷으로 정신없이 헤매고 있을 때다.

“맨날 어떻게 잘칠 수 있나. 그래도 넌 평소 잘하잖아. 나를 봐, 나를, 난 어떡하라고~”

절묘한 워딩이다. 자신을 낮추면서 평소 상대 실력을 헤아려준다. 처음 보는 다른 동반자나 캐디 앞에서 구겨진 나의 체면을 살려준다.

홀인원을 한 지인이 얼마 후 라운드에서는 그야말로 나락으로 떨어졌다. 캐디가 원래 홀인원 하면 6개월 동안 골프가 잘 풀리지 않는다는 멘트를 날렸다.

그 한마디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랐다고 한다. 진실을 떠나 자기 마음이 그렇게 믿고 싶었단다. 인지부조화로 위로를 받는 사례다.

스트로크 내기에서 배 판 규정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버디 값을 면제해줘도 고맙다. 나는 보기를 하고 두 명은 버디, 나머지 동반자는 파를 했을 때다.

만약 전 홀에서 비겨 배 판인 데다 버디를 잡은 사람에게는 여기에 또 배 판을 더해 두 명에게는 4배, 나머지 한 명에게는 2배를 줘야 한다. 계속 보험 역할만 해오다 이런 임계 상황에 처하면 정말 울고 싶다.

안쓰럽게 여겨 버디 관련 배 판을 면해주면 감지덕지다. 극도로 상한 마음을 겨우 지탱하면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을 어떻게 알았는지 안아주고 싶다. 신사는 자기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절제한다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한다.

OB나 패널티 구역에서 공을 잃어버린 대신 그 곳에서 유명 브랜드 새 공을 2~3개 주워도 상한 마음을 달랜다. 타이틀리스트나 스릭슨, 젝시오 상표가 선명하게 찍힌 공이 울지 말라면서 나를 달랜다.

특히 연두색 컬러 볼을 보면 마음이 누그러지고 평정심을 찾는다. 연고처럼 상처 난 마음을 치료한다. 색상, 브랜드, 번호가 주는 치유의 힘이다.

그날따라 컨디션 난조로 힘겹게 경기를 이어가는 도중 연속 OB를 내는 동반자에게 멀리건은 극약 처방이다. 멀리건을 남발해도 문제지만 완전 녹초가 된 동반자에게는 응급 치료제다.

그 절박한 심정을 헤아려 멘털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면 다행이다. 너무 망가지는 모습을 지켜보면 동반자 마음도 무겁다.

“동반자 한 명이라도 행복하지 않았다면 그날 골프는 행복한 골프가 아니다. 모두가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다.”

골프를 좋아하는 친구가 들려주는 골프행복론이다. 진지함, 그리고 배려와 위로가 없는 골프는 건조하고 삭막하다.

역설적인 위로도 있다. 모두가 OB를 냈을 때다. 모두의 실패는 모두에게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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