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이 열광하는 센 언니의 본질은? [양민영의 한 솔로]

양민영 입력 2022. 12. 9.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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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민영의 한솔로] 여자들의 싸움은 구경거리에 불과하다

[양민영 기자]

▲ 스파링  여성은 물리적인 싸움과 친하지 않다.
ⓒ 양민영
스파링 중에 상대의 손목을 잡았다가 깜짝 놀랐다. 뼈와 관절에서 양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방금 잡았던 부위가 빨갛게 물들더니 부어오르는 게 보였다. 저대로 두면 멍이 시퍼렇게 들 텐데.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어서 팔을 꺾으려던 계획을 얼른 포기했다. 대신 상체를 내 쪽으로 끌어 오려고 라펠(도복 상의의 깃이 접히는 부분)을 잡아당겼는데 터무니없이 가벼워서 한 번 더 놀랐다. 

주짓수를 배우기 전에는 아무리 동성이라도 몸을 밀착할 일이 거의 없었다. 주짓수 때문에 체구가 작은 여성은 아동과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작다는 걸 새삼스럽게 확인했다. 가뜩이나 스파링 경험이 많지 않았던 나는 여성을, 특히 작은 여성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주저하곤 했다.

나는 남성 평균보다는 작지만 보통의 여성들과 비교하면 큰 편에 속한다. 나보다 체구가 작고 힘도 약한 여성을 상대로 전력을 다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될 일이다. 그렇다고 너무 힘을 주지 않거나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그 또한 연습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문제가 된다. 적당히 압박하면서 적당히 공격해야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데 그 '적당히'를 아직도 터득하지 못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가뜩이나 전적이 있어서(등 뒤에서 날 공격한 남자... 살기 위해 반격했더니) 평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아니면 오래전에 청산했다고 믿었던 착한 여자 콤플렉스를 아직도 내버리지 못한 건지 모른다. 한번은 나보다 오래 수련한 힘센 여성에게 알지도 못하는 기술로 완전히 제압당한 적이 있었는데 차라리 그런 순간에는 마음이 편했다. 비록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지만. 

한마디로 여성은 물리적인 싸움과 친하지 않다. 싸우라고 멍석을 깔아주는 주짓수 도장에서조차 서먹하고 어색하다. 만약 우리가 어릴 때부터 '여자애들은 치고받으면서 자란다'는 말을 들었다면, 풀마운트 자세에서 얼굴을 때리고 코피를 터뜨리는 데 익숙했다면, 달랐을까?

한 가지 분명한 건 여성이 싸움과 서먹한 이유는 우리가 특별히 얌전한 존재라서, 혹은 폭력성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저 어릴 때부터 억압된 채로 살았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속 세상

텔레비전에는 정반대의 세상이 펼쳐진다. 특정 시간대에 방영되는 드라마를 보면 걸핏하면 여성들이 엉켜서 몸으로 싸우고 있다. 중년 이상의 시청자를 겨냥한 막장 드라마 속 여성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맹렬하게 싸운다.

특히 아침 드라마로 분류되는 일일극에는 여성들이 과격하게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드라마 앞에 붙은 '아침'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자극이 넘친다. 불륜, 혼외 임신, 출생의 비밀, 친자 확인으로 시작하는 아침이라니, 꼭 아침 식사로 마라탕을 먹는 기분이다.

매운맛 5단계인 자극의 홍수에서 뺨을 때리거나 얼굴에 물을 끼얹는 클리셰는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개중에서도 드라마계의 대모 김수현 작가가 대본을 쓰고 2007년 방영한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 2화에는 지금 봐도 놀라운 장면이 등장한다. 

이 시퀀스에서 극 중 주인공의 언니인 은수(하유미 분)는 여동생의 남편과 불륜을 저지른 동생의 친구 화영(김희애 분)의 얼굴에 주먹을 꽂는다. 위기감을 느낀 화영이 프라이팬으로 은수의 머리를 후려치고 은수는 격투기 도장에서 배운 업어치기 기술로 화영을 넘어뜨린다. 화영은 지지 않고 은수의 배를 걷어차며 반격한다.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의 한 장면
ⓒ SBS
 
은수가 훈련된 파이터라면 화영은 배운 적이 없어도 본능적으로 싸울 줄 안다. 둘의 격렬한 싸움은 눈두덩에 짙은 피멍을 남기고 끝났다.

이 드라마는 1회부터 은수가 격투기를 배우는 장면을 심심찮게 보여줬다. 샌드백을 발로 차고 주먹을 날리는 그의 표정은 비장하다. 호신이 목적이라지만 은수는 남편이 외도를 저지를 때마다 격투기로 응징했다. 그 결과 그의 표현을 빌리면 '이빨 서너 개 자빠뜨리는 건 일도 아닌' 실력자가 됐다. 

무려 15년 전에 방영한 드라마인데도 싸움 신과 더불어서 하유미 배우가 열연한 명장면은 '센 언니 밈'으로 자리 잡아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유튜브 영상의 댓글에는 '국민 언니 하유미', '은수 같은 언니가 있으면 두려울 게 없겠다'는 찬사가 넘쳐난다. 

센 여자의 본질
 
▲ 센 여자 센 여자의 본질은 ‘여자에게만 센 여자’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 양민영
은수와 그를 지지하는 댓글을 보면서 센 언니의 본질을 생각했다. 정의를 구현하고 불륜녀를 응징하는 센 언니는 과연 누구인가? 센 언니는 바람피우는 남편을 마당에 내동댕이치지만 절대 이혼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런 남편과 사이도 좋은 편이다. 센 언니는 동생 가정을 파탄 낸 여성을 향해 집요하고도 맹렬한 적개심을 발산한다.

폭행으로 모자라서 동네 마트에서 '불륜과 교양'이라는 주제의 대중 연설을 강행, 화영을 공개 처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불륜을 저지른 동생의 남편에게는 절대 비슷한 수위의 폭력이나 모욕을 퍼붓지 않는다. 심지어 센 언니는 동생 부부의 재결합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한다.  

이쯤 되면 센 여자의 본질은 '여자에게만 센 여자'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게 아니라면 화장이 센 여자라든가(여성용 화장품이나 향수의 이름에는 독, 유혹, 타락, 금기 같은 단어를 붙인다). 이들의 공격성은 오직 같은 여성, 특히 남의 남자를 유혹한 여성에게 향하고 남성 권력에는 손톱만큼의 해도 가하지 못한다.

이러한 본질을 알아차리는 건 다름 아닌 남자들이다. 한번은 어떤 남자가 자랑스럽게, 자신은 '주짓수 대회에서 남성부보다 여성부 경기를 챙겨 본다'고 말했다. 이유를 물었더니(궁금해서 물어본 건 아니다)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독이 올라서 싸우는 게 재밌거든요." 

막장 혹은 불륜 드라마로 분류되는 서사의 핵심은 여성 혐오다. 드라마가 새로 제작될 때마다 죄책감이 없고 죽지도 않고 강력한 악녀가 재부팅된다. 악녀가 전지전능할수록 결말부에 가해지는 응징과 폭력의 수위도 높아지고 대중은 열광한다. 권선징악으로 가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여자들의 싸움은 진지한 대결이나 심각한 폭력이 아니라 캣파이트이며 구경거리에 불과하다.

이 자극의 용광로에서 든 생각은 내가 알던, 공격성이 거세되다시피 한 현실의 여성은 어디 있느냐는 거다. 세게 붙잡기만 해도 부러질 것같이 작고 약한 여성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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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도 게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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