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국민 요리'가 불러온 소동 [전명윤의 타인의 식탁]

전명윤 입력 2022. 12. 7. 11:09 수정 2023. 1. 26.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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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식탁] 치킨 티카 마살라1

'타인의 식탁'은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의 음식을 소재로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봅니다. <편집자말>

[전명윤 기자]

2001년 4월 29일 영국의 외무장관이었던 로빈 쿡은 '치킨 티카 마살라'야 말로 이제 영국의 국민 요리로 자리 잡았으며, 이는 영국의 다원주의 정책이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주장했다. 훗날, 치킨 티카 마살라 연설이라고 불리는 이날의 언급은 여러 군데로 불똥이 튀었다. 연설의 주제인 영국의 다원주의 정책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영국 바깥, 특히 영국 요리를 무시하기로 소문난 프랑스나 이탈리아 사람들은 '피시 앤 칩보다야 치킨 티카 마살라가 낫지'라는 반응을 보였고, 커리의 원조국이라 할 수 있는 인도에서는 '치킨 티카 마살라? 이름은 인도 요리 같은데 그게 뭐지'라는 반응, 그리고 '이름을 보니 딱 봐도 인도 커리인데 저게 어떻게 영국 요리냐'며 발끈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소동은 본국인 영국에서도 벌어졌다. 런던을 비롯한 영국의 어지간한 인도 요릿집에서는 모두 만날 수 있는 이 커리가 원래 어디서 유래됐냐는 논쟁이 한바탕 이어졌다. 참고로 인도의 커리 만신전에는 치킨 티카 마살라라는 커리가 없다. 아니 요즘은 인도에도 치킨 티카 마살라라는 메뉴가 보이기도 하니 원래는 없었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커리이긴 하지만 인도에서 기원했다는 근거가 희박하다 보니 한동안 치킨 티카 마살라의 기원에 대한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의 한 레스토랑이 기원이라는 설과 런던의 한 레스토랑 기원설이 부딪치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해묵은 감정까지 불거져 나왔다. 고작 커리 하나가 어디에서 유래되었느냐를 가지고 말이다. 

인도 요리를 좀 먹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치킨 티카 마살라는 인도의 국민 커리인 버터 치킨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탄두리에 닭을 구운 후 뼈를 발려낸 살코기를 걸쭉한 커리소스에 풍덩 빠트려 먹는 방식부터 말이다. 굳이 차이를 따지자면 버터 치킨에는 토마토 퓌레가 더 많이 들어가고, 치킨 티카 마살라에는 양파 퓌레가 더 많이 들어간다는 점 정도라고 할까? 

인도의 식민 지배 역사
 
 암리차르 분단 박물관의 외관
ⓒ 전명윤
2020년 코로나 확산 전, 그러니까 현시점까지 내 마지막 취재여행지 중 한 곳은 전 편에서 이야기를 풀어냈다시피 암리차르라는 시크교도의 성지이자 인도령 펀자브에서 가장 큰 도시다.

구루 카 랑가르에서 카스트 제도와 싸우는 사람들을 본 후 며칠 후 릭샤가 나를 떨궈줬던 곳을 되짚어 걸어갔다. 몇 달 전 경기도 용인에 있는 내 집으로 인도에서 웬 소포가 날아온 적이 있었다. 누리끼리한 기름종이 안에는 작은 팸플릿이 하나 있었다.

분단 박물관(Partition Museum)이라고 쓴 그 소책자는 암리차르에 새로 문을 연 볼거리 하나를 소개하고 있었다. 몇 장 넘겨보니 1947년 벌어진 인도와 파키스탄 분단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한국 마냥, 아니 한국보다 더 치열하게 4번 개전하고 4번 종전선언을 한 운명의 숙적들. 이걸 박물관으로 만들었다고? 호기심이 밀려올 수밖에 없었고, 분단 박물관은 구루 카 랑가르와 함께 내가 암리차르까지 오게 된 두 번째 이유이기도 했다. 

우리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승전국, 더 정확히는 미국이 만든 세계 질서 속에 살고 있다. 2차 대전 이후의 국제질서는 영토 점령을 기반으로 한 제국주의 시대의 종지부를 찍었고, 1차 대전 직후와 달리 패전국의 식민지뿐 아니라 승전국의 식민지도 독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한국의 독립도 그 시대의 산물이고, 인도도 그즈음에 독립했다.

하지만 독립과 함께 어떤 지역은 분단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한반도와 인도는 2차대전 이후의 질서 속에 탄생한 대표적인 분단국가다. 굳이 거창하게 분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2차 대전 이후 많은 지역들이 서로 단절됐다.

과거에는 국가 간 경계가 희미했기에 누구나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시대였지만 이제 많은 사람들은 국가끼리 그려놓은 가상의 선 안에서 살아야 했다. 이런 단절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고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실향민이라고 부른다.

고작 36년 정도의 식민 지배를 받은 한반도와 달리 인도의 식민 지배 역사는 길다. 역사책에서야 1858년 인도통치법이 발효된 이후 영국의 인도 지배부터 기술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힌두교도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1206년 무슬림들에 의해 델리에 델리 술탄국이 수립되면서부터로 거슬러 올라간다. 합치면 무려 815년의 식민 지배다.

1206년으로부터 세포이의 항쟁이 패배하고 무굴제국이 멸망하던 시점인 1858년까지 즉 652년간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고, 다시 1858년부터 1947년까지 89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은 셈이다. 

예상하듯 무슬림의 지배가 힌두들에게 썩 좋았을 리는 없다. 그나마 무굴제국 치세로 접어들면서 한동안 비이슬람교도에 대한 인두세가 면제되는 등의 유화정책이 펼쳐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기간은 그리 좋진 않았다. 

종종 힌두교 사원은 허물어져야 했고, 무슬림 지배자의 변덕에 의해 개종 작업이 진행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하층 카스트에 속하는 힌두들은 개종당해야 했다. 하지만 이건 그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끼리나 공유되는 정보였다. 

무슬림 지배자와 상층 카스트 힌두들과의 관계는 비교적 우호적이었는데 무슬림 지배자들은 어느 정도의 세력이 있는 힌두교 상층 카스트들이 등 뒤의 비수가 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렇기에 몇몇 무슬림 황제들은 배후의 힌두왕국의 공주와 정략결혼을 하기도 했다.

확고한 자기 정체성이 있는 무슬림과 달리 힌두는 애초부터 하나의 구심점이나 정체성이 없는 편이다. 이건 힌두교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한데, 힌두교라는 말 자체가 무슬림이나 시크교처럼 내가 정확하게 어떤 종교집단에 속해있는지를 알 수 없으나 어떤 신앙을 가진 인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총합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이 시대의 종교 구분은 '저 사람은 무슬림', '나는 무슬림이나 시크교도가 아닌 사람' 정도였고, '그런 나를 저들이 힌두라고 부르네' 정도의 의식만 있었다. 어차피 힌두라는 말은 인도라는 뜻, 즉 지리적 개념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근대의 비극
 
 인도 파키스탄 분단 와중의 폭력을 다룬 영화 <핀자르>
ⓒ 위키피디아
 
근대란 어쩌면 자연인인 개인에게 어떤 소속감을 부여하면서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적당히 자기가 살던 마을 바깥을 벗어나지 않고 평생 살던 사람들에게 갑자기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고,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당신은 어떤 카스트에 속한다는 걸 굳이 가르쳐 준 건 영국이었다. 

예를 들어 펀자브주에 살던 라제시는 무슬림도 아니고 시크도 아니었기에 힌두로 분류됐다. 힌두로 분류되다 보니 카스트에 속했어야 했는데, 이 카스트라는 것도 그전까지는 유명한 카스트 씨족이나 자기 정체성이 있었지, 마을에서 적당히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 경계가 희미했다. 라제시는 영국 식민정부가 시행한 인구 조사를 거치면서 비로소 바이샤라는 계급군에 속하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정체성을 부여한다는 일은 일면 긍정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부여한 소속감과 정체성은 결국 나와 남을 구별하는 용도로 쓰이기 시작했고, 나아가서는 내 소속이 아닌 이에 대한 적대감으로 표출되곤 했다.

즉 이전까지 마을에서 적당히 어울려 살던 사람들이 힌두와 무슬림으로 나눠지기 시작했다. 정체성은 어떤 사건을 공유하면서 더욱더 유대가 깊어지기 마련이고, 이런 식의 '사건의 공유'는 교육을 통해 이루어진다.

힌두교도들은 비로소 1529년에 라마 사원이 파괴되고 그 위에 비브리 모스크가 세워진 것을 알게 되었고, 1025년 아프가니스탄의 무슬림 통치자였던 가즈니의 마흐무드가 인도를 침략해, 당시로서는 가장 아름다웠다고 알려진 솜나트의 힌두교 사원을 약탈하고 시바 링감을 파괴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자신의 시대를 비교적 담담하게 기술하는 데 비해 교육을 통해 그 시대를 학습한 사람들이 외려 식민 지배국가에 대한 더 강렬한 적개심을 표출하는 걸 우리는 흔히 본다. 교육의 세례를 받은 힌두교도들도 그랬다. 민족의식과 종교적 정체성으로 무장한 교육받은 힌두교도들은 무슬림의 지배에 분노하지 않는 남은 사람들을 각성시키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결과적으로 영국의 근대교육은 힌두와 무슬림에게 정체성을 부여했는데, 이로 인해 인도 사회는 분열됐다. 아무 생각 없이 마을에서 함께 살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들은 전혀 알지도 못하는 1025년과 1529년의 일로 인해 힌두들의 공공의 적이된 무슬림들도 처음에는 황당해했지만, 이내 전열을 정비해 '우리 무슬림'으로 뭉쳤다. 하나의 국가에 우리 힌두와 우리 무슬림으로 나뉘어버렸다는 건 이후에 몰고 올 수많은 비극을 암시했다.

영국이 이 상황까지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식의 전개가 나쁠 리는 없었다. 1930년대 이후 인도 국민의회가 독립 투쟁의 핵으로 떠오르자 영국은 무슬림 조직을 육성해 이를 견제하게 했다. 

준비 없이 맞이한 독립
 
 인도 파키스탄 국경의 양측 경비병들, 검은색 제복이 파키스탄 군이다.
ⓒ 전명윤
콜카타의 주교였던 헤버는 '영국은 인도를 점령하지 않았다. 다만 힌두들이 무슬림에게 점령당했다는 사실을 알려줬을 뿐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이는 식민지의 두 주체 사이에 영국이 했던 역할을 상징한다. 나눠진 두 세력이 갈등하고 분열하는 와중에 진짜 적을 망각한 채 상대방 죽이기에만 골몰하는 걸 우리는 인도의 역사 속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차 대전이 시작되고 영국군이 인도인의 파병을 결정하자 힌두로 이루어진 국민의회는 총파업으로 맞섰고, 무슬림들은 파병선포일을 감사의 날로 제정했다. 영국의 전쟁에 함께 희생할 수 있어 고맙다는 의미였는데, 행위로만 본다면 친영매국노라는 딱지를 붙일 법하지만, 무슬림은 무슬림대로 사회 소수자로서 그게 다수인 힌두의 억압에 맞서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영국은 양쪽을 오가며 지렛대 역할을 했고, 힌두도 무슬림도 때로는 영국과 화해하며 상대방을 압박했고, 때로는 상대방을 압박하기 위해 영국과 싸웠다.

민족주의의 세례를 받은 힌두는 인도가 자신들만의 땅이라고 생각했다. 무슬림은 그들 자신이 힌두가 말하는, 힌두가 꿈꾸는 독립의 주체가 아님을, 더 나아가 인도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걸 시간이 갈수록 깨달아갔다. 이제 두 세력은 하나의 역사 속에서 자신들의 조국을 바라보지 않았다. 힌두의 영웅은 무슬림의 반란자였고, 무슬림의 신앙심 깊은 황제는 힌두 입장에서는 학살자였다. 

1945년 2차 대전이 종전되고 영국 노동당이 집권하며 독립 전야가 되자 힌두와 무슬림이 하나 되는 나라를 꿈꾼 이는 마하트마 간디와 그를 따르는 일부뿐이었다. 국민의회 내부에서도 간디의 한나라론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영국이 인도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는 건 힘의 공백을 의미했다. 이미 떠나기로 한 영국은 제국의 통치력을 잃었고, 그 통치력을 힌두 기반의 독립운동 조직인 국민의회나 무슬림 기반 조직인 무슬림리그가 계승한 것도 아닌 상태가 지속되면서 힌두와 무슬림 인구가 비등비등한 지역을 중심으로 쌍방 학살이 이어졌다.

난리가 난 예전의 수도였던 콜카타로 간디가 급히 달려가 단식투쟁을 벌였지만 이제 간디조차 '꼰대' 취급을 받았다. 사태가 감당할 수 없어지자 영국은 독립할 때까지 치안을 담당해야 한다는 책임과 의무를 방기한 채 본국으로 돌아가 버리기 위한 계획에 착수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충분한 준비가 이뤄지지 않은 채 독립을 맞이해야 했다. 영국도 영국대로의 이유는 있었다. 이제 영국군 안에서도 인도인 병사에 의한 하극상이 수태 일어나며 그들조차 안전을 담보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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