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가면 따로 살자" 여행 떠났다 싸운 룸메이트
[조영준 기자]
▲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동에 버쩍 서에 번쩍> 스틸컷 |
ⓒ 서울독립영화제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타인과의 거리를 가늠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이의 거리가 실제로는 훨씬 더 멀리 놓여있기도 하고, 멀다고 여기고 있던 사람과의 거리가 너무 갑자기 가까워지기도 한다. 관계라는 것이 어느 한쪽이 고정된 상태로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가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상태에서 각자의 기준과 감정으로 그 거리를 측정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친구나 연인 사이마저 사소한 이유로 망가지고 끊어질 수 있으며,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과도 금방 친밀감을 느끼며 호칭을 허락하게 되는 것이 우리 모두가 가진 타인과의 관계이자 거리일 것이다.
면접을 보고 결과를 기다리는 화정(우화정 분)과 룸메이트 설희(여설희 분)는 일출을 보며 소원을 빌자며 즉흥적으로 동해 여행을 떠난다. 밤 버스를 타고 도착한 바닷가, 두 사람은 해가 뜨기만을 기다리지만 무심결에 잠이 드는 바람에 일출을 놓치고 만다. 아쉬운 마음에 하루를 더 묵기로 한 두 사람. 이때 화정이 설희에게 어렵게 말을 꺼낸다. 평생 누군가와 같이 살았으니 이제는 혼자 한번 살아보고 싶다고. 여행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면 따로 살자고.
▲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동에 버쩍 서에 번쩍> 스틸컷 |
ⓒ 서울독립영화제 |
각자 따로 살고 싶다는 화정의 고백 이후, 두 사람은 크게 다투고 각자 움직이게 된다. 오해 아닌 오해가 두 사람 사이에 놓이게 되면서 그동안 드러나지 않던 갈등이 터져버린 탓이다.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존재했던 것처럼 보인다. 부족했던 여유와 고백의 타이밍, 그리고 서로 다른 사정이다. 먼저 두 사람은 함께 살고 있지만 서로 깊은 속마음을 나눌 만큼 여유가 있는 상황은 아니다. 졸업을 하고 취업 자리를 알아보고 있지만 녹록지 않음을 몸소 경험하고 있는 화정과 평생 하던 운동을 그만두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아직 찾아내지 못한 설희. 영화가 보여주는 장면 내에서는 두 사람의 내적 친밀도가 높아 보이지만, 그 이면에 놓여 있는 서브텍스트의 지점에서 화정과 설희는 각자의 삶을 버텨내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서로의 속마음을 쉽게 꺼내고 허심탄회하게 나눌 시간이나 여유가 과연 그들에게 있었을까.
화정이 말을 꺼낸 타이밍도 그렇게 좋지는 못했던 것 같다. 아르바이트 자리 하나 제대로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지도 가늠이 되지 않는 설희의 입장에서 어제 보고 온 면접에 합격할 것 같다던 화정의 독립 선언이 그리 좋게만 여겨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함께 살고 있는 집의 보증금은 모두 화정의 것이니, 그 말대로라면 설희는 보증금부터 구해야 하는 조금은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화정이 그런 상황을 모를 리 없는데, 자신의 취업이 될 것 같은 시점에 이런 말을 꺼내는 일이 설희에게는 어떻게 느껴졌을까. 두 사람의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03.
그렇게 불편한 마음으로 따로 동해를 맴돌게 되는 두 사람. 그 과정에서 설희는 공황장애로 과호흡에 힘겨워하는 지안을 만나 돕게 되고, 화정은 잃어버린 앵무새를 찾고 있는 여학생을 만나게 된다. 영화는 이 각각의 두 만남을 우연에 의한 것처럼 포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설희와 지안은 미래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리고 현재의 자신을 포기하고자 하는 지점에서, 또 화정과 여학생은 학교 폭력과 따돌림의 지점에서 서로 교차하며 만나게 되는 이야기가 존재한다.
다시 말하자면 여기에서 설희가 지안을, 또 화정이 여학생을 돕는다는 뜻은 단순히 물리적인 보탬이 되는 것 이상을 뜻한다는 말이다. 설희와 화정은 지안과 여학생이 놓여 있는 부정적인 상황을 이미 겪고 지나온 대상으로 자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두 사람이 지금의 이 시기를 잘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되어준다. 물론 현재의 문제를 직접 해결해주거나 대신 나서 준다는 뜻은 아니다. 잃어버린 앵무새를 찾는 길을 함께 걷는 일과 공황장애로 혼자 가기 힘든 집까지의 거리를 동행하는 일까지는 해줄 수 있어도 앵무새를 찾는 일과 안정을 되찾는 일을 직접 해줄 수 없는 것과 동일하다.
▲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동에 버쩍 서에 번쩍> 스틸컷 |
ⓒ 서울독립영화제 |
동해에서 벌어진 두 사람 각자의 이야기가 끝날 무렵, 이번에는 설희가 화정에게 솔직한 마음을 전한다. 잠깐이지만 곁에서 지켜본 지안에게 남은 마음이 있기에 화정 먼저 서울로 올라가라는 말이다. 영화의 초반부와는 두 사람의 입장이 완전히 달라졌다. 한 사람에게는 솔직한 마음의 표현이 때에 따라서는 서운한 마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상대를 무시하거나 배려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런 말을 하게 될 때도 생긴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서로에 대한 감정이나 거리와 같은 문제가 아니라 더 넓은 세상과 많은 마음을 품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여행의 배경이 되는 장소나 시간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탈의 공간으로 여겨지곤 한다. 이 영화가 비추는 것은 단지 이틀에 걸친 짧은 여행일 뿐이지만 오히려 현실에 더욱 가까운 느낌이 든다. 우리의 삶은 취업과 꿈이라는 명확하게 새겨진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보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음에도 계속해서 나아가는 일과 닮아 있으니 말이다. 때문에 여행을 끝내고 제자리로 돌아온 두 사람이 어쩌면 이제 더 이상 당락의 결과에 휘둘리지 않고, 꿈의 유무에 얽매이지 않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것들 모두를 무시한 채로 살아가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조금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는 의미로.
영화의 마지막에서 쉬지 않고 계속해 달려 나가는 설희의 모습이 잔상처럼 오래 기억 속에 남는다. 두 사람의 삶 속에는 지금보다 더 무겁고 어려운 문제가 계속해서 쌓일 것이고, 타인과의 거리나 관계도, 미래에 대한 자신의 꿈과 목표도 모두 원하는 대로 풀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 장면은 영화가 스크린 너머의 관객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메시지인지도 모르겠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정처가 없고 종적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전하고자 하는 이 영화의 작은 매듭과도 같은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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