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전 소현세자 죽음 다룬 영화 '올빼미'의 날갯짓
[고광일 기자]
▲ 영화 <올빼미> 영화 <올빼미> |
ⓒ 영화 <올빼미> |
세자가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인조실록이 스크린에 뜬다. 화면은 옅은 안개가 껴있는 어스름한 새벽으로 바뀐다. 아이를 업고 한 사내가 사력을 다해 질주한다. 한참을 달린 끝에 문을 하나 열면 건너편에 산이 보이고 이제 막 뜨는 태양이 능선을 넘어 강렬하게 빛을 비춘다. 사내는 그 빛을 바라보며 기쁜 듯 슬픈 듯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화면은 곧이어 하얗게 변한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에 이 장면이 똑같이 반복된다.
▲ 영화 <올빼미> 영화 <올빼미> |
ⓒ 영화 <올빼미> |
주인과 노예가 바뀌는 순간
<올빼미>는 인조실록에 남겨진 한 줄로 시작한다. 영화가 진행되면 관객들은 숨 가쁘게 뛰던 사내가 주인공인 경수(류준열), 그가 업고 뛰던 아이는 소현세자(김성철)의 아들이자 인조(유해진)의 원손임을 알게 된다. 영화의 목적은 이들의 신분을 밝히려는 건 아니다. 뛰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도 크게 관심이 없다. 오로지 관심 있는 건 '빛'의 변화다. 정확히는 빛을 바라보는 관객의 변화다.
어의 이형익에게 뛰어난 침술 실력을 인정받아 궁으로 들어간 경수는 주맹증 환자다. 빛이 강한 낮에는 볼 수 없지만, 밤에는 약간 볼 수 있다. 경수는 '사람들은 소경이 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며 자신의 병을 숨긴다. 아픈 동생을 돌봐야 하는 입장에서 '미천한 것들은 보고도 못 본척해야 살 수 있다'며 소현세자가 독살된 사실을 숨기려고도 한다. 소시민의 삶과 사연 있는 경수 처지에 이입한 관객들도 자연스럽게 밝은 빛보다 캄캄한 어둠을 더 편한 시간으로 느끼게 된다.
▲ 영화 <올빼미> 영화 <올빼미> |
ⓒ 영화 <올빼미> |
소현세자는 짧은 등장에도 큰 변화를 주도한다. 극에서 경수의 소극적 태도를 흔드는 것 역시 소현세자다. 우연히 경수가 밤에는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이렇게 말한다. '안 보고 사는 게 몸에 좋다고 하여 눈을 감고 살기보다 그럴수록 눈을 더 크게 뜨고 살아야 한다'고.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 조선은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소현세자는 볼모로 잡혀 청나라로 끌려간다. 8년 만에 귀국한 소현세자는 인조에게 말한다. 청나라를 벗으로 삼아 신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을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헤겔이 말한 '주인과 노예의 역설'을 떠올려보자. 주인은 처음에 노예보다 우위에 있다. 하지만 노예의 노동에 의존하며 점점 노예 없이 살 수 없는 비자립적 인물이 된다. 반면 노예는 노동을 통해 대가를 받고 능력을 계발하며 자립성을 취득해 결국에는 위치가 뒤바뀌 게 된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 상황에서 노예가 자유의지를 깨닫고 투쟁한다는 전제가 꼭 필요하다.
▲ 영화 <올빼미> 영화 <올빼미> |
ⓒ 영화 <올빼미> |
올빼미의 날갯짓이 향하는 곳
경수는 주맹증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고, 궁에서 벌어진 피바람에 휘말린다. 물론 영화를 끝까지 보면 통쾌한 스토리라 생각할 수 있지만 관객의 찜찜함은 가시지 않는다. 소현세자는 암살당했고 원손은 유배지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바뀌지 않았다.
헤겔은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되어야 날갯짓한다'고 말했다. 철학은 앞날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현상이 일어난 후에 역사적인 조건을 고찰해 의미를 분명히 한다는 의미다. 자유의지를 통해 개인의 성공은 가능할지 모르나 사회를 바꾸지 않는다면 경수가 겪었던 각자도생의 아수라판이 언제든 휘몰아칠 수 있다.
약 400년 전의 일을 다룬 <올빼미>의 날갯짓이 어쩌면 우리 시대의 비극으로 반복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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