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호의 시시각각] 중국 민주화, 백지시위로 동트나

남정호 2022. 12. 6. 01:1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근대화에 따른 필연적 성격 짙어
시 정권, 코로나 문제로 진퇴양난
한국에 영향 커 비상한 관심 필요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며칠 전 서울 신촌의 한 대학에서 생각지 못한 걸 목격했다. 기둥에 붙은 반(反) 시진핑 벽보였다. '자유 중국(Free China)'이란 큼지막한 글씨 위에 "독재자가 아니라 우리의 리더를 우리가 선택하겠습니다" 등 시진핑 정권 치하에선 감히 언급할 수 없는 구호로 가득 찬 벽보였다. 살짝 표현이 어색한 게 중국 유학생이 붙인 듯했다. 지난 10월 중국 공산당 당대회 이틀 전, 베이징 중심부 쓰퉁차오(四通橋)에 걸렸던 반시진핑 현수막의 내용이란다. 중국 정부의 처벌이 두려웠을 텐데 무척 간절했던 모양이다. 요즘 중국 각지에서 들불처럼 번지는 '백지 시위'가 우리 곁에 다가왔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지난달 27일 중국 베이징 량마차오에서 우루무치 화재 사망자를 추모하는 백지 시위가 열렸다. 로이터=연합뉴스

요즘 중국 전역은 팽팽한 긴장에 휩싸여 있다. 코로나 봉쇄로 촉발된 백지시위가 확산하는 가운데 개혁·개방의 상징인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까지 타계해 여차하면 반독재 운동이 터질 분위기다. 그간 중국에선 거물 정치인이 숨지면 민주화 운동이 불붙곤 했다. 중국의 민주화 운동을 일컫는 천안문(天安門) 사태의 경우 1976년 1차 때는 가장 존경받던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 장례, 1989년 2차 때는 민주화의 상징인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의 장례를 계기로 발생했다. 게다가 오는 10일은 '세계 인권의 날'이다. 중국 인권운동가들은 이때 시위를 벌이곤 했다. 그러니 시진핑 정권이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다.
얼핏 보면 이번 백지시위는 유난스러운 코로나 봉쇄 정책 탓으로 비칠 수 있다. 이런 인식에선 '위드 코로나 정책'으로 전환해 봉쇄를 풀면 문제가 풀릴 걸로 보일 것이다. 세계 제일의 안면 인식 기술을 갖춘 중국이라 시위자들을 쉽게 색출할 수 있어 시위가 곧 진압될 거라는 분석도 적잖다. 천안문 사태 때와는 달리 강력한 시위 지휘부가 없다는 점도 신속한 진압이 예상되는 이유다.

지난달 말 서울 신촌의 한 대학 캠퍼스에 중국의 코로나 봉쇄정책 등을 규탄하는 포스터가 붙었다. 남정호 기자

하지만 이런 시각은 도도한 역사적 흐름을 간과하고 있다. 이번 백지시위는 20여 년 전 중국을 세계 경제에 끌어들이기 위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시킨 미국의 결단과 맥이 닿아 있다. 1990년 말 당시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은 WTO에 중국이 들어가면 결국 민주화가 이뤄질 것으로 믿었다. 그는 1998년 중국 방문 직전, 이런 성명을 냈다. "장기적으로 세계가 중국을 끌어들일수록 이 나라에 더 많은 자유가 유입된다… 중국인들도 언론·출판·결사·신앙의 자유를 누릴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없다." 경제 발전이 중산층 확대를 낳고 이들이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함으로써 민주화가 이뤄진다는 '근대화 이론'에 기초한 낙관론이었다.
하지만 지난 20여 년간 중국은 이런 기대와는 달랐다. 눈부신 성장은 이뤘지만 민주화는커녕 시진핑 정권이 들어선 이후 권위적 국가로 퇴행했다. 국제사회가 인권과 민주화 문제를 제기하면 시진핑 정권은 "중국의 발전 모델은 따로 있다"며 무시했다. 그럼에도 봉쇄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데다 장쩌민의 장례와 국제 인권의 날까지 겹쳐 백지시위가 어디로 튈지 모른다.
지휘부가 없다고 하나 2010년대 초 '아랍의 봄' 때 목격했듯, 요즘은 주도 세력 없이도 얼마든지 반독재 시위가 이뤄지는 SNS 혁명의 시대다. 외국의 자유로운 공기를 느껴 본 중국인들도 부지기수다. 2000년 1000만 명이던 중국의 해외 관광객 수(연인원)는 코로나 발발 직전인 2019년에는 1억5500만 명에 달했다. 더 큰 문제는 코로나 문제에서 시진핑 정권은 진퇴양난이란 사실이다. 제로 코로나 정책을 버리면 의료시스템 마비로 200만 명 넘게 숨질 걸로 예상돼 쉽게 풀 수도 없다.
중국이 뿌리부터 변하면 안보에서 경제에 이르기까지 한국에 미치는 영향은 말할 수 없이 크다. 화물연대 파업에서 월드컵까지 오만 중대사가 꼬리를 물지만 그럼에도 바다 건너 백지시위의 향방에 특별한 관심을 쏟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