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포럼] 바람과 별과 빛이 된 넋들처럼…

정현목 2022. 12. 6.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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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목 문화부장

이태원 참사의 슬픔이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곧 49재를 치르고, 참사 100일, 1주기 또한 기념하겠지만, 유족이 겪는 슬픔의 무게는 야속한 세월에도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떠안은 남겨진 이들에게 때론 백 마디 말보다 한 곡의 노래가 큰 위로가 되기도 한다.

세월호 참사에 이어, 이번에도 추모곡 ‘천개의 바람이 되어’가 많은 이들의 슬픔을 달래줬다. 이번 참사로 지인을 잃은 필자 또한 노래를 반복해 들으며 눈시울을 적셨다. 노래의 원곡은 ‘천의 바람이 되어(千の風になって)’다. 광고·사진·작곡 등 다재다능한 일본 유명 소설가 아라이 만(新井滿)이 2003년 말 작자 미상의 영시를 일본어로 번역해 멜로디를 붙였다. 암으로 아내를 잃고 괴로워하는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나의 사진 앞에서 울지 마요/ 나는 그곳에 없어요 (중략) 나는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바람이 되었죠/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가을엔 곡식들을 비추는 따사로운 빛이 될게요 (중략) 밤에는 어둠 속에 별 되어 당신을 지켜 줄게요.…’

「 일본 작가의 ‘천개의 바람이 되어’
죽은 이가 산 사람 위로하는 노래
“떠난 이의 몫까지 열심히 살아야”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가수 임형주가 2009년 김수환 추기경과 노무현 대통령 추모곡으로 헌정하면서 널리 알려진 이 노래는 저작권 때문에 한동안 영어로만 불렸다. 하지만 2013년 말 작곡자 아라이가 한국어 버전을 허락해, 이듬해 세월호 참사 때 더욱 절절한 가사의 추모곡으로 불렸다. 아라이는 세월호 참사 소식에 비통해하며 “너무나 가슴 아픈 비극이다. 내 노래가 큰 슬픔에 빠진 한국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천의 바람이 되어’는 죽은 이가 화자가 되어 산 사람을 위로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노래다. 한국어 버전에선 ‘사진’으로 바뀌었지만 ‘무덤’이란 가사가 일본 가요에 등장한 건 이 노래가 처음이다. 15년 전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아라이는 이 노래의 힘에 대해 “세상을 떠난 소중한 사람이 수십억 광년 떨어진 곳에 간 게 아니라, 바람이 돼서 내 곁에 있다는 가사가 사람들에게 위로는 물론 용기와 희망을 북돋워 준다. 시가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의 애니미즘(만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사상)에서 비롯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가 이런 노래를 만들 수 있었던 건, 삶과 죽음이 맞닿아있다는 걸 일찍 깨우쳤기 때문이었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읜 그에게 조산사였던 어머니는 ‘아무런 의미 없이 태어나는 생명은 없다’는 가르침을 줬다. 고교 3년 때 고향인 니가타에서 발생한 지진과 쓰나미의 공포를 체험한 그는 대학 진학 후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인한 급성 십이지장 궤양으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위의 대부분을 적출, 체중이 절반으로 줄면서 “죽음이 그리 멀리 있는 게 아니”란 걸 느꼈다고 한다.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선 죽음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체험적 깨달음은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끼쳤다. ‘천의 바람이 되어’에 자신의 생사관을 응축시켰고, 동일본 대지진 때는 쓰나미에서 살아남은 소나무를 소재로 ‘희망의 나무’라는 제목의 사진시집을 냈다. 기적의 소나무가 쓰나미에 휩쓸려 바람과 별이 된 소나무들의 보호를 받으며 희망차게 살아간다는 내용이었다.

‘특별한’ 노래로 많은 이들의 슬픔을 달래줬던 그도 결국 ‘바람’이 됐다. 지난해 12월 초, 75세 나이로 세상을 뜨자, 그의 아내는 홈페이지에 “남편이 지금, 천의 바람이 되어 일본은 물론, 전 세계와 우주를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다”는 글을 올렸다. 임종 직전 그가 가쁜 숨으로 지인들에게 남긴 말은 ‘Love(사랑) & Peace(평화)’였으며, 장례식장에는 그의 바람대로 ‘천의 바람이 되어’가 계속 흘러나왔다고 한다.

수많은 넋을 ‘바람’과 ‘별’, ‘따사로운 빛’으로 승화시킨 아라이는 강연회 등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재생의 시작이다. 죽음을 슬픔만으로 끝내선 안 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어찌 보면, 그는 로마 철학자 키케로의 말처럼 “삶 전체가 죽음의 준비였던 지혜로운 사람” 중 한 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 참사에서 소중한 이를 잃고,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절망과 비통에 빠진 유족들에게 그의 또 다른 말로 위로를 전하고 싶다. “떠난 이에 대한 최고의 공양(供養)은 그의 몫까지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로부터 소중한 생명의 바통을 이어받았다는 생각으로 꿋꿋하게 버티며 살아내야 한다.”

정현목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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