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포커스] 극장국가 북한

2022. 12. 5.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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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극장국가다.

이 개념은 일본 도쿄대 와다 하루키 교수가 19세기 발리의 정치체제를 분석한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의 '극장국가 느가라'에서 차용해 북한에 처음 적용했다.

극장국가를 단순화해 정의하면 체제의 정통성을 멋진 '서사'로 포장해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선전함으로써 주민을 포섭한다는 것이다.

북한이 보여주는 수많은 상징 조각물과 영화, 연극, 소설, 그리고 담화 등이 극장국가를 구성하는 주요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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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


북한은 극장국가다. 이 개념은 일본 도쿄대 와다 하루키 교수가 19세기 발리의 정치체제를 분석한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의 ‘극장국가 느가라’에서 차용해 북한에 처음 적용했다. 극장국가를 단순화해 정의하면 체제의 정통성을 멋진 ‘서사’로 포장해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선전함으로써 주민을 포섭한다는 것이다.

북한이 보여주는 수많은 상징 조각물과 영화, 연극, 소설, 그리고 담화 등이 극장국가를 구성하는 주요 수단이다. 특히 북한이 그간 가장 공들여 만들어온 서사는 김일성이 1930년대 빨치산 투쟁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을 건설한 후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상대로 투쟁해 왔다는 것이다. 미국에 빌붙어 사는 남조선과 달리 북조선은 경제적으로 어렵더라도 주체의 깃발 아래 존엄을 지키며 살았다는 자부심을 통해 ‘정신 승리’를 선포한다.

김정은 시기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과시의 정치’를 덧붙여 극장국가 효과를 더욱 극대화하고 있다. 2022년은 역사적으로 김정은이 만들어낸 극장국가 서사의 정점을 찍는 한 해로 기록될 수 있다. 논리는 비교적 간단하지만 강렬하다. 우선 김일성 시기 만들어진 ‘총대철학’을 소환한다.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은 “칼 든 놈하고는 칼을 들고 싸워야 이길 수 있다”라면서 1926년 6월 열네 살 된 김일성에게 두 자루의 권총을 남긴다. 북한은 두 자루의 총을 총대철학으로 발전시켜 “민중이 총칼을 들고 일어나 제국주의와 싸워 나라를 찾고 착취와 압박이 없는 새 세상을 세워야 한다”라는 수사를 입혔다(권헌익·정병호, ‘극장국가 북한’).

김정은은 2022년 두 자루의 총을 화성-17형이라는 “강위력한 주체탄”으로 완성했다고 선언한다. 2022년 3월 24일 “국력이 약해 두 주먹으로 흐르는 피를 닦아야만 했던 민족 수난의 한을 재웠고 자자손손 무궁 번영할 우리 민족의 내일을 재웠다”라면서 화성-17형에 의미를 부여했다. 9월 9일 핵법령을 통과시킨 14기 7차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는 보다 노골적으로 “두 자루의 권총으로부터 시작된 우리 혁명이 완성됐다”고 선포한다. 지난달 18일에는 한발 더 나아가 마침내 화성-17형이라는 ‘절대무기’로 “인민의 끝없는 행복, 후대들의 밝은 웃음”이 확보됐다고 강변한다. 김정은은 김일성 시기에 두 자루의 총으로 시작한 빨치산 시대를 화성-17형이라는 “강위력한 보검”을 통해 완성했다는 ‘선핵(先核)’ 과시의 정치를 2022년 한 해 써 내려간 것이다.

북한의 핵 질주는 당분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핵을 안고 굶어 죽을지언정 포기할 수 없음을 2022년 최대치로 극장에 올려 보여줬다. 그러나 극장에 올린 연극은 언젠가는 막을 내릴 수밖에 없다. 삼대에 걸쳐 75년 이상 같은 주제로 관객을 모은 놀라운 솜씨를 보여줬지만 앞으로 30년을 더 끌고간다면 관객은 결국 떠날 것이다. 아무리 극적 효과를 강화하더라도 배고픔과 추위를 참으면서 연극을 보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1990년대 후반에 출생해 초보적 시장 경제와 외부 문물에 접촉 경험이 있는 ‘장마당 세대’는 언젠가 극장 밖의 세계를 보려 할 것이다.

김정은의 북한도 이를 고민하고 있다. 지난 3월과 11월에 보여준 ‘탑건’ 형태의 영상은 새로운 기법을 극장에 올려 젊은 고객을 유도하려는 선전선동의 변형이다. 이전의 대중적 사회동원과 정치교양의 기술이 새로운 세대에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고민의 산출이다. 그러나 연극의 테제를 선핵이 아닌 선경(先經)으로 바꾸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텅 빈 극장에 김정은 혼자 앉아 있게 될 것이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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