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축구는 전쟁의 대체물

천지우 2022. 12. 5.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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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유럽인들은 서로를 난도질하지 않고도 미워하는 방법을 발견한 듯하다. 이 기적은 축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는 '밀레니엄'에 관한 글을 청탁받고 '유럽'을 떠올렸고, 지난 1000년간 유럽의 역사가 '유혈'로 점철되다 2차 세계대전 후 평화가 유지된 것을 보니 '축구가 전쟁의 대체물이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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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우 정치부 차장


“이제 유럽인들은 서로를 난도질하지 않고도 미워하는 방법을 발견한 듯하다. 이 기적은 축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미국 작가 폴 오스터가 1998년에 쓴 글 중 일부다. 그는 ‘밀레니엄’에 관한 글을 청탁받고 ‘유럽’을 떠올렸고, 지난 1000년간 유럽의 역사가 ‘유혈’로 점철되다 2차 세계대전 후 평화가 유지된 것을 보니 ‘축구가 전쟁의 대체물이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반쯤은 농담이겠지만 그럴듯한 말이다. 오스터는 “지난 1000년간 유럽의 어느 나라도 이웃 나라의 침공과 모욕을 피할 수 없었으며, 이번 1000년이 마무리되는 현시점에서 보면 가끔 유럽 대륙의 역사 전체가 축구 경기장에서 요약돼 재현되는 듯하다”고 썼다.

유럽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 월드컵 기간에는 전 세계의 일이 된다. 짧은 반바지 차림의 대리군(軍)들이 모의 전쟁을 벌이면 해당국 시민들 사이에선 국뽕 민족주의, 광적인 애국심이 치솟는다. ‘그깟 공놀이가 뭐라고…’라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하지만, 축구 국가대항전에는 불가항력적인 무언가가 있다. 한국 대표팀 16강 진출의 기적이 이뤄진 밤, 한국인이라면 열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본 대표팀이 스페인을 꺾고 16강에 오르자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대표팀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국민이 용기와 기운을 얻었다”고 말했다는데, 온 국민이 용기와 기운을 얻을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이번 카타르월드컵은 대회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정치적인 이슈가 끊임없이 생산됐다. 대회 내부에선 이란이 큰 관심을 끌었다. 이란에서 벌어진 반정부 ‘히잡 시위’의 여파가 월드컵에까지 미쳤다. 이란 대표팀은 첫 경기 때 히잡 시위를 지지하는 의미에서 국가를 부르지 않았고, 두 번째 경기에서 이긴 뒤에는 이란 대표팀 감독이 “이제 (정치에서) 축구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세 번째 경기에선 적성국 미국과 16강 티켓을 놓고 벼랑 끝 대결을 펼쳤다. 이란은 0대 1로 석패했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주먹을 불끈 쥐며 ‘USA’를 연호했다.

대회 외적인 이슈로는 러시아와 중국을 들 수 있겠다. 러시아는 직전 월드컵 개최국인데도 이번 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유럽 지역 플레이오프를 앞둔 지난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국제축구연맹(FIFA)으로부터 대회 출전 무기한 금지 처분을 받았다. 진짜 전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전쟁을 대체하는’ 월드컵에서 퇴출된 것이다.

중국의 사정도 한심하다. 사상 처음으로 아시아축구연맹 소속 3개국(한국·일본·호주)이 16강에 진출하는 등 아시아 국가들이 선전한 이번 월드컵 본선에 ‘축구 후진국’ 중국은 오르지 못했고 TV로 다른 나라 경기를 봐야 했다. 그런데 중국인들이 TV 중계를 보니 다른 나라 사람들은 모두 마스크를 벗고 축구를 즐기고 있었다. ‘저들은 저렇게 자유로운데 왜 우리만 봉쇄·통제된 채로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카타르월드컵이 중국의 ‘백지 시위’를 촉발시킨 셈이다.

카타르월드컵 개최를 사흘 앞두고 한국의 국회 운동장에선 무려 22년 만에 여야 의원 축구대회가 열렸다. 고성이나 몸싸움 없이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경기는 0대 0 무승부로 끝났다. 전쟁을 대체한다는 의미에서 이런 이벤트는 나쁘지 않다. 여야의 극한 대립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일부 극렬 지지자들은 축구대회에 참가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을 향해 “지금이 이럴 때냐”고 화를 냈다고 한다. 전쟁으로 상대를 절멸시키기만을 바라는, 사회에 해가 되는 마인드다.

천지우 정치부 차장 mog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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