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동의 축적의 시간] ‘더 빨리, 더 싸게’의 함정…위기 대응력을 키워야

입력 2022. 12. 5. 00:37 수정 2022. 12. 5. 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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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기술발전의 방향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2021년 3월 1일 강원도 영동지역에 88㎝의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다. 사망자가 나오고 90명 이상의 부상자 소식을 전하는 뉴스가 숨 가쁘게 전해졌다. 간선도로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사람들은 3시간에 1m도 움직이지 못했는데, 자동차 연료가 다 떨어져 간다고 불안에 떨었다. 영동 일대 시민들의 삶이 글자 그대로 올스톱 되었다.

기록적인 폭설이니 어쩔 수 없다 싶었지만, 제설차가 예년에 비해 턱없이 부족해 보이는 것에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했다. 알고 보니 해당지역 지자체가 12월 10일에서 3월 10일까지 계약해오던 기존의 제설장비 임차기간을 예산 효율성을 위해 1월과 2월 중 50일간만 임차하는 것으로 단축했다. 기존 기상자료를 분석한 결과 12월과 3월에는 폭설이 ‘거의’ 없었다는 패턴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 포털기업 화재에 국가 전반 혼란
초연결사회 속 위기확산 빨라져

효율성 클수록 외부 충격에 취약
0.1% 리스크가 시스템 무너뜨려

위기에 놓인 글로벌 공급·생산망
미래 불확실성 줄이는 기술 필요

지난해 영동지역 폭설이 남긴 것

지난해 3월초 예기치 않게 내린 폭설로 강원도 인제군 미시령 터널 요금소 일부 구간 차로가 통제됐다. [뉴스1]

안타깝게도 시민들은 3월의 폭설에 갇혔고, 지자체의 터무니 없는 행정에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곰곰이 따지고 보면 욕할 일이 아니다. 효율적인 재정 운영이라는 목표를 가진 공무원들이 재정을 줄일 방법을 찾아 열심히 노력한 끝에 무려 3억4000만원의 세금을 아꼈다. ‘효율성’이라는 잣대로 본다면 분명 칭찬받을 일이었다. 만약 확률이 낮더라도 치명적 결과가 초래될 수 있는 ‘취약성’을 추가로 고려했다면 의사결정이 달라졌을 것이다. 대신 비효율적인 것처럼 보이는 3억4000만원의 추가비용을 기꺼이 용인해야 한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중국 산둥성에 있는 자동차용 전선 회사 몇 개가 가동을 중지했다. 납품물량과 일정을 딱 맞게 짜놓았던 국내 자동차 회사로서는 생산라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2021년 3월과 4월에는 차량용 반도체를 생산하는 일본 르네사스와 대만 TSMC 공장에서 화재가 났고, 자동차 회사들은 반도체를 구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었지만, 차질을 피할 수 없었다.

그 여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자동차 회사들은 재고 제로를 목표로 효율성을 높이는 데 최선을 다해온 기존의 관행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적정 재고수준을 높이거나 복수의 공급망 대안을 마련하는 등 전략을 수정하고 있다. 모두 아무 일 없던 시기에는 전혀 들일 필요가 없었던 취약성 대비 비용이자 리스크 프리미엄이다.

‘월마트 물가’는 얼마나 지속될까

현대 문명은 하나의 특징적인 발전 패턴을 가지고 있다. 바로 생산성 혹은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마치 올림픽 구호처럼 ‘더 빨리’ ‘더 적은 비용’이 목표다. 전력·통신 등 인프라 시스템을 중앙집권형으로 구성하는 것도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가능한 정교한 예측과 과학적 관리법으로 불확실성과 무작위성을 최소화하면서 효율성이 극대화되도록 현대 문명을 조직해왔다.

지난 100년간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도 효율성을 추구하면서 지금의 그물망과 같은 생산망을 형성할 수 있었다. 같은 품질에 조금이라도 더 싸게 공급해줄 수 있는 납품업체가 있다면, 지구 그 어느 구석에서라도 찾아내 연결하면서 공급망을 확장해왔다. 그 덕분에 인류는 옷 한 벌 살 돈으로 두세 벌 살 수 있는 소위 ‘월마트 물가’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림자 없는 빛이 어디 있으랴. 이렇게 정교하게 직조한 경제·사회 시스템은 역설적으로 작은 외부적 충격에도 극히 취약하게 되었다. 99.9%의 평화로운 상태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다가 0.1%의 낮은 확률에 불과하던 위기가 현실화하는 순간 시스템이 올스톱되는 경직성을 보인다. 강원도의 폭설로 멈춰선 영동지역이나, 별 볼 일 없어 보이던 하네스 공급 차질로 올스톱된 자동차 생산라인이 대표적인 예다.

이런 취약성은 다양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팬데믹이 터지고 미국 사회가 보인 처참한 혼란의 양상도 그렇다. 그렇게 물 흐르듯이 효율적으로 돌아가던 선진국 시스템의 이면에 상상할 수 없는 취약성이 잉태돼 있다는 것을 알고 세계는 경악했다. 멀리 볼 것 없이 지난달 카카오 데이터센터 화재로 온 국민의 삶이 사실상 일순간 정지됐던 경험도 마찬가지다. 효율성이 높아질수록 취약성이 높아지는 현상은 논리적으로 피할 수 없는 상충관계다. 높은 효율성을 위해 취약함을 각오하거나 아니면 취약함에 대비하기 위해 일정 부분 효율성을 희생해야 한다.

단일품종 바나나, 취약성 대표 사례

우리의 먹거리도 효율성과 취약성의 상충관계에서 자유롭지 않다. 인류는 모두 캐번디시라는 단일한 품종의 바나나를 먹는다. 단일 품종의 최대 이익은 당연히 생산 효율성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병충해나 환경변화와 같은 외부 영향에 취약하다는 문제를 시한폭탄처럼 안고 있다. 1950년대까지 옥수수의 단일 품종으로 세계를 지배하던 그로 미셀 종은 ‘파나마병’이라는 균류가 퍼지면서 초토화됐고, 그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지금 우리가 먹는 캐번디시 종이다.

그러나 이 역시 최근 변종 파나마병인 TR4 곰팡이균이 세계적으로 퍼지면서 막대한 피해가 예상되고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바나나 팬데믹’이라고까지 할 정도다. 전 세계 옥수수도 사실상 단일 품종이기 때문에 유사한 문제에 노출돼 있다. 옥수수 공급에 문제가 생기면 가축사료의 가격과 수급에 영향을 미치고, 육류와 유제품 및 계란 가격뿐만 아니라 이들을 재료로 하는 거대한 글로벌 식품체인 전체가 흔들리게 될 것이다.

그 파급효과는 현재의 반도체 수급위기로 인한 제조업의 글로벌 공급망 혼란을 훨씬 뛰어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모두 효율성을 추구하면서 어쩔 수 없이 안게 된 취약성의 그림자다. 이 때문에 최근 식품 분야의 기술발전 방향은 단일 품종의 더 높은 효율성을 추구하기보다 취약성을 보완하거나 다품종을 개발하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

투자 우선순위 재점검할 때

과거에도 외부 충격으로 인한 사회와 경제시스템의 취약성은 항상 드러났지만, 대체로 지역 혹은 국가단위에 한정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지금은 기술발전 덕분에 세계의 경제망과 사회 시스템이 고도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한 곳에서 발생한 위기의 영향이 곧 글로벌 차원의 쓰나미 같은 파괴적 영향으로 확산할 수 있다. 이제 눈 가리고 무작정 질주하는 말처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달려온 지금의 발전 궤적이 과연 지속가능한 추세인지 되돌아볼 때다.

오늘도 연구실과 기업 현장에서 신기술과 신제품을 만들어내고자 밤새고 있는 연구자와 기술자·기업가들은 자신도 모르게 더 높은 효율성을 목표로 달려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난 100년간 ‘효율성’을 추구해 온 기술 궤적에서 한 발짝 물러나 ‘취약성’이라는 중요한 키워드를 생각한다면 미래를 지배할 새로운 기술의 궤적을 창출할 수도 있다. 앞으로는 취약성에 대비하는 것이 하나의 큰 시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개별 기업의 시각과 달리 국가적 관점에서는 모든 국민이 의존하는 국가 시스템의 취약성에 더 철저히 대비하고 투자해야 한다. 투자 우선순위부터 재점검이 필요하다. 통신이나 전력과 같은 국가 핵심 인프라에 투자할 때도 성능을 업그레이드하거나 투자비용을 절감하는 것 못지않게 위기 때 취약성에 대한 대응력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백업이나 복구·보안과 관련된 기술과 투자의 가치가 달라 보인다.

복구·보안 기술이 중요한 시대

“어떤 기술을 개발하는 데 세금을 써야 할까”라는 질문에도 효율성 못지않게 취약성을 심각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기술 선진국들이 국가전략기술을 이야기할 때 사이버보안이나 식품안전, 위생 관련 기술을 빼놓지 않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장 돈이 되느냐의 문제를 떠나 낮은 확률이지만 위험이 현실화했을 때 국민 전체가 입게 될 피해가 예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일흔이 넘은 한 기업인과 나누었던 대화가 잊히지 않는다. 기술자로 출발해서 기술기업을 일구었고, 지금까지 현장을 지키고 있는 존경할 만한 기업인이었다. 수십 년 기업을 키워오면서 얻은 인생교훈 한 가지를 귀띔해주었다. “좋은 기회를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치명적인 나쁜 일에 미리 대비하는 게 중요하더라.”

좋은 일이야 있으면 좋은 것이고, 없어도 다음 기회를 기다리면 되지만, 한 번의 치명적인 나쁜 일을 막지 못하면 기업이 망하기 때문이다. 같이 창업했던 동년배의 수많은 기업가가 좋은 기회를 놓쳐서가 아니라 대비하지 못했던 한 번의 나쁜 일로 사라져가는 것을 수십 년 보고서야 얻은 한 줄의 교훈이라고 했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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