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독립50대] 딸에게 들킨 일기장... 그래도 계속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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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심 기자]
▲ 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유성룡비망기입대통력-경자' 언론 공개회에서 대통력이 전시되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에 오른 문신이자 '징비록'의 저자로 잘 알려진 서예 류성룡(1542~1607)이 쓴 것으로 보이는 '유성룡비망기입대통력'경자'는 오늘날의 달력에 해당하는 책력으로 충무공 이순신(1545~1589)에 대한 내용도 담고 있어 주목된다. |
ⓒ 연합뉴스 |
매일의 사소한 기록이 보물이 되고 역사의 기록이 되는 장면은 대통력이 아니어도 박물관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다. 누군가의 소소한 일상의 기록이 위대한 가치가 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매일'은 절대 똑같지 않다
다이어리를 대체로 꾸준히 쓰고 있다. 다이어리의 첫 장을 기록할 때의 마음과는 달리 시간이 지나며 점점 소홀해지고 느슨해지는 것도 연말이면 늘 드는 생각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하루씩 걸러 다이어리를 펴는 날이 많았고, 내용도 특별할 것 없이 몇 글자 억지로 옮겨 적는 날도 있었다. 이런 마음으로 내년에도 다이어리가 필요할까 고민하던 시점이었는데, 때마침 대통력은 자극제가 되었던 것 같다.
▲ 다이어리를 쓰는 일 |
ⓒ 픽사베이 |
나만 조심하면 누구에게 보일 염려가 없는 그야말로 비밀 일기장으로 쓴 것이었다. 내 감정을 숨길 필요도 속일 필요도 없이 일기는 5년 넘게 이어졌다. 여러 권의 노트를 남겼는데 십수 번의 이사에도 버려지지 않았고 더 깊숙한 곳에 숨어있다가 비우기를 실천하며 책장과 장롱을 들쑤시다 나온 것이었다.
그 일기장이 중학교에 다니던 호기심 많은 딸의 눈에 띄었고 딸은 엄마에게 말하지 않고 몰래 읽었노라고 고백했다. 당황스러운 마음을 누르며 내심 덤덤히 그랬냐고 넘겼는데, 엄마의 지난 시간의 고생스러움에 눈물이 나왔다며 딸은 감상을 얘기했다.
시간이란 것이 한때의 은밀하고 부끄러운 이야기도 대범하게 넘길 만큼 많은 것을 덮어주는 것 같았다. 가볍지 않은 마음을 풀어놓은 공간이었고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던 지키고 싶은 자존심 같은 것이었는데, 그걸 들킨 마음이 이상하게도 괜찮았다.
당시 마음을 잊고 싶지 않아 몇 번의 정리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주저하며 지켜냈던 것이었는데, 시간이 흘러 딸에게 받는 위로와 공감이 나쁘지 않았다. 더불어 당시의 모든 일들이 더는 마음이 불편하지도 삶을 짓누르는 느낌도 들지 않아 치유된 느낌까지 들었던 것 같다.
살면서 느끼는 순간순간의 자잘한 어려움도 시간이 지나면 그러하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 혼자 삭이는 방법으로 어딘가에 다시 다시 일상을 적기 시작했다. 10년 전과는 다른 이야기가 적혔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과 아이들의 이야기가 적혔다. 학원과 학교교육과 부모의 역할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어려움과 갈등, 그런 복잡한 마음이 글로 적으면 묘하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내년에는 어떤 이야기가
처음의 일기장은 대학노트라고 이름 붙은 것이었다. 굴러다니는 빈 노트나 여백이 남은 노트면 뭐든 가리지 않았다. 여러 권을 날짜별로 고리로 묶어 보관하기도 용이했다. 10년 후 다시 시작한 일기장은 어느 회사에서 판촉용으로 만든 업무용 다이어리였다. 표지도 깔끔하고 두께도 적당한, 여러 업체에서 받은 몇 권의 다이어리는 만족도가 높았다. 적당히 내 비밀을 감춰줄 것 같은 가죽 표지도 좋았고 종이질도 훌륭했다.
최근 몇 년간 사용한 일기장은 스타벅스 다이어리다. 나름 일상을 정리한다고 해도 연말이 되면 여백이 많이 남는다. 아깝지만 다이어리의 남은 부분을 다음 해에 이어 적지는 않았다. 다시 새로운 다이어리로 새해를 시작했고 지난 것은 책장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방식으로 교체되곤 했다.
내년엔 지난 몇 년과는 다르게 쓰고 싶다는 생각이다. 꾸미는 것이 아닌 예전처럼 다이어리의 본래의 기능에 집중하고 싶다. 여백으로 남은 페이지에 대한 해결 방법도 생각 중이다. 마침 퇴근길 저녁 방송에서 환경을 생각하는 차원으로 '물건 끝까지 쓰기' 실천 운동을 제안한다.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종이 한 장의 소중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다이어리의 남은 페이지를 다음 해에 이어서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러기 위해 특별히 어느 해의 다이어리라고 표지에 두드러지게 특정되지 않은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예전의 대학노트와 같이 너무 넓지 않은 간격의 줄과, 늘 손에 쥐고 다닐 수 있고 언제든 꺼내 적을 수 있는 정도의 부담스럽지 않은 크기와 두께면 좋겠다. 어느 가방에도 무난하게 들어가고 다이어리의 무게가 압박으로 다가오지 않을 만큼 적당한 것이면 충분하다.
유능한 목수는 연장 탓을 하지 않지만 그래도 매일을 함께할 것이니 신중하게 다이어리를 골라 본다. 매달 한 권씩 분리된 연간 다이어리가 우연히 눈에 들어와 장바구니에 넣었는데 곧바로 품절로 뜬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른 것을 다시 찾는 중. 아마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스타벅스 다이어리로 겉멋도 내 봤고, 명품 로고까지는 아니어도 나름 이름이 알려진 제품도 사용해 봤다. 이젠 한 가지 목표만을 생각하며 예전의 감성으로 다이어리 아닌 일기장을 채워가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시간이 지나면 나의 사는 이야기가 될 일기, 내년엔 또 어떤 이야기가 적힐지 막연하게 기대가 된다. 한 해가 기우는 시점에서 무겁게 가라앉던 마음이 다이어리를 고르며 잠시 들뜨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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