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요정' 김영권, 위기의 순간마다 그가 있었다
[이준목 기자]
▲ 김영권의 동점골! 3일 오전(한국시간) 카타르 알라이얀의 에듀케이션 시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H조 3차전 대한민국과 포르투갈 경기. 김영권이 동점골을 넣고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수비수 김영권(울산 현대)이 특별한 순간을 앞두고 있다. 다가오는 브라질과의 16강전(12월 6일 오전 4시)에 출장하게 되면, 김영권은 태극마크를 달고 센추리클럽(A매치 100경기 출전)에 가입하게 된다.
2010년 8월 나이지리아와의 평가전에서 처음으로 성인대표팀에 발탁되어 데뷔전을 치른 지 12년 만이다. 김영권은 지난 포르투갈전까지 A매치 99경기에 출전하여 총 7골을 기록중이다. 벤투호에서 주장 손흥민(A매치 107경기 35골)에 이어 두 번째로 국가대표 경험이 풍부하고, 주전 베스트 11 중에서는 어느덧 최고참(나이로는 김태환에 이어 두 번째)의 베테랑이 됐다.
김영권은 대표팀에서 손흥민-김승규와 함께 2014년 브라질, 2018년 러시아 대회에 이어 이번 카타르까지 무려 3회 연속 월드컵 본선무대를 밟고 있는 3인방 중 한 명이다. 역대 한국 선수 중 월드컵에 3회 이상 출전한 선수는 총 13명에 불과하며, 이중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주전으로 활약한 수비수'로만 국한하면, 홍명보-이영표와 김영권까지 단 3명 뿐이다.
4회 연속 월드컵 무대를 밟은 소속팀 사령탑 홍명보 감독에 이어, 김영권은 센터백으로는 무려 20년 만에 3회 연속 월드컵 출전에 성공한 수비수로 이름을 올렸다. 여기에 이번 대회에서는 2전 3기만에 월드컵 본선에서 '12년 만의 원정 16강 진출'을 이뤄낸 주역으로 맹활약하면서, 김영권은 명실상부한 한국축구 '레전드 수비수의 계보'에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됐다.
▲ 호날두 '이게 들어가네' 3일 오전(한국시간) 카타르 알라이얀의 에듀케이션 시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H조 3차전 대한민국과 포르투갈 경기. 0-1로 뒤진 전반 27분 왼쪽에서 이강인(마요르카)이 왼발로 차올린 코너킥이 호날두의 등에 맞고 골문에 앞에 떨어진 뒤, 마침 문전에 있던 김영권이 넘어지면서 날린 왼발 발리슛이 포르투갈 골망으로 향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김영권은 U-20 월드컵-아시안게임-올림픽-아시안컵-월드컵 등 연령대별 대회에서 성인대표팀까지 한국축구 국가대표로서 출전할 수 있는 모든 대회를 두루 경험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주장까지 역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랜 국가대표 경력에 비하여 김영권이 항상 좋은 평가만 받아왔던 것은 아니다.
2013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이란전-2014년 브라질월드컵 조별리그 알제리 쇼크처럼, 한때는 중요한 경기마다 치명적인 실수를 잇달아 저질러 국대 수비수들의 단골 멸칭인 '자동문'이라는 오명을 써야 했다. 2017년에 이란전을 마치고 인터뷰에서 부진한 경기력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관중의 응원함성 때문에 소통이 잘 안 됐다"는 부적절한 실언으로 여론의 엄청난 뭇매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무르익는 와인처럼 김영권의 진가는 세월의 흐름이 쌓이면서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매순간 당대 최고의 선수들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명멸하는 대표팀에서, 김영권은 강산이 바뀌고도 남을 시간동안 변함없이 묵묵하게 그 자리를 지켜왔다. 화려한 공격수도 주목받는 스타플레이어도 아니었지만, 김영권은 언제나 팀에서 없어서는 안 될 선수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김영권의 국가대표 커리어를 돌아보면 묘한 징크스가 반복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알고보면 그는 역대 감독들의 플랜에 있어서 비중있는 선수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1순위'였던 수비수는 아니었다. 그런데 하필 중요한 국제대회나 빅매치를 앞두고 파트너에게 꼭 문제가 생겨서 김영권이 그 자리를 메꿔야 했던 경우가 유독 많았다.
그 시작은 2012년 런던올림픽이었다. 당시 홍명보호의 주전 센터백 조합으로 예상된 것은 홍정호와 장현수 콤비였다. 그런데 두 선수가 대회를 코앞에 두고 모두 부상으로 낙마하면서 3순위였던 김영권이 갑자기 부동의 주전으로 올라섰고 사실상 수비진을 리드해야 하는 중책이 맡겨졌다. 김영권은 황석호와 함께 후방을 든든하게 지키며 한국축구 역사상 첫 올림픽 동메달을 이끄는 데 기여했다.
2018년 러시아월드컵에서도 당초 신태용호의 플랜A는 장현수-김민재 조합이 유력했다. 그런데 김민재가 월드컵을 앞두고 부상으로 낙마하면서 김영권이 주전으로 올라섰다. 또다른 주전인 장현수는 월드컵에서 연이은 실수로 부진을 거듭하며 비난의 중심에 놓이자, 대표팀은 결국 마지막 독일전에서는 김영권을 중심으로 수비조합을 재구성해야 했다.
사실 김영권도 당시 월드컵을 앞두고 얼마전까지만 해도 평가전에서 연이은 실수를 거듭하며 팬들의 비난을 듣던 처지였다. 하지만 정작 월드컵 본선에서는 일약 환골탈태한 경기력을 보여주며 전 경기 풀타임 출장에 몸을 날리는 호수비를 연이어 보여주며 재평가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독일전에서는 후반 추가시간에서 코너킥 상황에서 극적인 선제 결승골까지 작렬하며 '카잔의 기적'을 이끌어낸 주역으로 대반등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국민 욕받이 신세였던 김영권의 극적인 재발견이었다.
▲ 11월 24일 오후(현지시간) 카타르 알라이얀의 에듀케이션 시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H조 1차전 대한민국과 우루과이 경기. 한국 김영권이 우루과이 카바니의 슛을 막아내고 있다. |
ⓒ 연합뉴스 |
벤투호에서도 김영권의 묘한 징크스는 계속됐다. 벤투 감독이 초반에 중용하던 장현수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대표팀에서 영구 퇴출되면서 이후로는 김영권-김민재 콤비가 벤투호의 주전 센터백 조합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월드컵에서는 반드시 이겨야 했던 포르투갈과의 최종전을 앞두고 김민재가 종아리 부상으로 출전이 불가능해지면서, 또다시 김영권이 새 파트너와 함께 수비진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4년 전 독일전을 앞둘 때와 흡사한 상황이었다.
이번에도 절체절명의 순간에 대표팀을 벼랑끝에서 구해낸 것은 바로 김영권으로부터 시작됐다. 김영권은 벤투호가 0-1로 끌려가던 전반 27분, 세트피스 상황에서 문전으로 쇄도하여 슬라이딩에 이은 왼발 슈팅으로 동점골을 작렬했다. 조별리그 3차전, 가장 중요한 순간에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수비수 김영권이 첫 골을 넣었다는 것도 4년 전 카잔의 기적과 똑같았다.
또한 김영권은 본업인 수비에서도 독일전을 연상시키듯 몸을 날리는 허슬플레이와 호수비를 연이어 선보이며 팀을 여러 차례 실점 위기에서 구해냈다. 김영권의 공수에 걸친 맹활약에 있었기에 한국은 대역전극의 희망을 이어갈 수 있었다. 후반 36분 골반부상으로 손준호와 교체되기 직전 결국 다리에 경련까지 일으킨 모습은, 김영권이 얼마나 이 경기에서 혼신을 바쳐 임했는지를 보여준 장면이었다.
김영권은 포르투갈전 득점으로 '승리 요정' 공식도 이어갔다. 수비수라는 특성상 골이 많은 선수는 아니지만, 대표팀은 김영권이 골을 터뜨린 7경기에서 반드시 이긴다는 필승공식을 이어갔다. 2011년 세르비아전(2-0 승)에서의 A매치 데뷔골을 시작으로 2015년 1월 아시안컵 4강 이라크전(2-0 승), 2018년 월드컵 독일전(2-0) 등, 김영권의 득점이 대부분 강팀과의 대결이나 중요한 경기에서 터진 영양가 높은 득점이었다는 것도 높이 평가받는 대목이다.
김영권에게 그동안 월드컵은 회한과 아픔이 더 많았던 추억이었다. 처음 주전으로 나섰던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며 수비 붕괴의 주범이라는 오명을 써야 했다. 러시아 대회에서는 카잔의 기적을 이뤄냈지만 조별리그 통과에는 또다시 실패했다. 그리고 세 번째이자 어쩌면 마지막일 가능성이 높은 카타르 월드컵에서 김영권은 드디어 한풀이에 성공했다. 한국의 극적인 승리와 16강 진출이 확정되는 순간, 김영권의 얼굴에도 마침내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돌이켜보면 한국축구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순간마다 항상 그 자리에는 김영권이 있었다. 오랜 노력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팀성적이 받쳐주지 못하여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언성히어로'가 이제야 그 아쉬움을 털어낼 수 있게 됐다.
어느덧 센추리클럽을 앞둔 레전드에게 부디 브라질전이 그의 마지막 월드컵 경기가 되지 않기를, 그리고 태극마크를 뛰고 함께하는 시간이 좀더 이어질 수 있기를, 많은 팬들이 김영권을 응원할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