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한반도 주둔 도와 '국방 장관' 된 한국인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입력 2022. 12. 4.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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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조희연

[김종성 기자]

이완용은 극도로 신중했다. 처음에는 친미파였다가 나중에 친미·친러 성향을 보인 그는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이 성사되기 직전에 친일파로 전격 변신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늑약 강제를 목적으로 입국한 11월 9일 이후에 상황을 주의 깊게 관찰하다가 늑약 체결을 주도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고종이 일본의 간섭을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1896년 아관파천 이후에 주한일본공사 고무라 주타로는 이완용을 두고 '갑(甲)이나 을(乙) 어느 쪽에나 투신할 여지가 있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지금은 친미파이자 친러파이지만 언제든 변신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봤던 것이다. 이완용은 그 '언제든'의 시점을 최대한 신중히 결정해 을사늑약 직전에 친일파로 갈아탔다.

그런 이완용과 달리, 상당히 일찍부터 친일에 뛰어든 인물들이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17권이 일본 남작 작위를 받은 일, 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 고문을 지낸 일, 한국 강점을 도운 공로로 은사공채와 한국병합기념장 등을 받은 일 등을 근거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조희연이 그중 하나다.

강렬한 친일

철종 임금 때인 1856년에 태어나 18세 때인 1874년 무과에 급제한 조희연은 훈련원과 기기국(무기 제조처) 등을 거쳐 평안도 희천군수와 경상도 창원부사 등을 역임한 뒤 동학혁명(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발발한 1894년부터 친일파로 두각을 보였다.

그는 일본보다는 청나라가 여전히 강하다고 인식되던 시기에 욱일기를 과감하게 선택했다. 욱일기는 1870년에 육군 군기가 되고 1889년에 해군 군기로도 채택됐다. 그래서 친일파 조희연이 친일 노선을 명확히 한 1894년에는 욱일기가 일본군의 군기가 되어 있었다.

1894년은 한반도 세력구도의 일대 전환점이었다. 이 해 2월 15일(음력 1월 10일) 동학농민군이 조선왕조 지배질서에 대항해 일어났지만, 왕조에 타격을 줬을 뿐 전복시키지는 못했다. 실리를 챙긴 쪽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자국민 보호를 명목으로 군대를 파견해 청나라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조선을 장악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래 경제 방면에서 우위를 점했던 일본은 이때부터 정치·군사적 우위까지 행사하게 됐다.

일본군이 조선에 상륙한 날은 1894년 6월 9일(음력 5월 6일)이다. 5월 6일로 적혀 있는 책들도 있지만, 5월 6일은 음력 날짜다. 일본군은 청나라군 상륙 나흘 뒤인 양력 6월 9일 인천에 상륙했다.

이때 파병의 명분으로 자국민 보호를 내걸었던 일본군은 얼마 안 있어 본색을 드러냈다. 7월 23일 경복궁을 장악하더니 7월 25일에는 청나라와 전쟁까지 일으켰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승전으로 장식하고 조선과 중국의 관계를 끊어놓았다.

그런데 일본군이 상륙한 6월 9일 이전만 해도, 그런 상황 전개를 예측하기는 힘들었다. 1882년에 청나라가 군대를 보내 임오군란을 진압한 뒤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이 사상 최대로 팽배해져 있었다. 그래서 그런 예측이 더욱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희연은 6월 9일 이전부터 일본 쪽에 기운 듯한 모습을 보였다. 동학군에 밀린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려 하자 그는 이것을 강하게 반대했다.

1993년에 <친일파 99인> 제1권에 실린 역사학자 오연숙의 '조희연: 일본군의 조선 침략에 앞장선 군무대신'은 "조희연은 청나라에 병사를 요청하는 것에 대하여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였다"라며 "청국군이 온다면 동아(東亞)의 소요를 야기시킬 뿐 아니라 열강의 간섭이 더욱 심해져 위기에 처하게 된다"는 이유를 내세웠다고 설명한다.

그가 청나라 군대를 반대한 진짜 이유는 동아시아의 혼란과 열강의 간섭에 대한 우려에 있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반대한 것이라면, 일본군의 조선 주둔 역시 반대했어야 한다. 그는 일본군에 대해서는 적극 환영하는 태도를 보였다.

일본군은 조선 정부 장악을 위한 경복궁 점령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흥선대원군을 끌어들였다. 정권에서 소외돼 있던 대원군을 입궐시키는 모양새를 연출해 점령의 불법성을 은폐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일본의 의도에 부응해 대원군 설득에 나선 인물이 전 창원부사이자 기기국 회판인 조희연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 서울역사박물관
 
2011년에 <동학학보> 제22호에 실린 강효숙 원광대 교수의 논문 '동학농민군 탄압 인물과 그 행적'은 "(7월 23일) 이날 대원군이 입궐을 주저하자 일본대사관 스기무라 후카시 서기관은 몰래 사람을 조희연에게 보내어 칙사를 대원군에게 보내어 속히 입궐하도록 하였다"라고 설명한다. 조희연이 일본의 부탁을 받고 대원군을 움직였던 것이다.

상대국의 요청도 없이 인천 상륙을 감행한 일본군은 조선 정부를 장악해 자기편으로 만든 뒤 청나라군과 전쟁하고 뒤이어 동학군을 진압했다. 조선 유사시에 자국민 보호를 명목으로 군대를 움직인 뒤 당시 한반도 정세의 3대 주체를 순차적으로 제거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조희연은 두드러진 활약상을 펼쳤다. 대원군 입궐을 성사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일본군을 군사적으로 응원하기까지 했다. 위의 오연숙 기고문은 "일본이 충청도 앞바다에 있는 청국의 군함을 먼저 공격함으로써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아산에서 청·일 양군이 접전하자, 조희연은 우범선·이두황·이범래 등을 선발대로 파송하여 일본군을 돕기도 하였다"라고 설명한다.

조희연은 또 다른 방식으로도 일본군을 응원했다. 전투 현장의 일본군을 직접 찾아가 위문하는 활동에도 참여했다. 청일전쟁은 일본이 조선에서 청나라를 몰아내고 조선을 장악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런 순간에 조희연이 맹활약을 했던 것이다.

그 공로로 조희연은 경복궁 점령 이후에 수립된 친일내각에서 군무대신 지위에 올랐다. 유사시 일본군의 조선 주둔을 도운 공로로 국방부 장관이 됐던 것이다. 아관파천으로 일본의 영향력이 일시적으로 감소한 1896년에 조희연 포박령이 내려지고 그가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 것은 이 시기에 그의 친일이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상속하지 못한 귀족 지위

조희연은 조선이 피보호국이 된 뒤인 1907년에 망명 생활을 끝내고 돌아왔다. 그 뒤 관료 겸 기업인으로 활동하다가 1910년 국권 침탈 뒤에 일본 남작이 되고 중추원(총독부 자문기구) 고문이 됐다.

그는 친일의 대가로 많은 것을 받았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조희연 편에 따르면, 1909년에는 일본 왕세자(황태자)가 주는 상금을 받았고, 국권침탈 뒤에는 고정적인 봉급을 받았다. "합방 직후인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관제가 시행되면서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어 1915년 4월까지 5년여 동안 매년 1600원의 수당을 받았다"라고 이 사전은 말한다.

1911년 1월에는 일본 정부가 주는 은사공채 5만 원도 받았다. 1910년부터 2년간 강원도 영월군수로 부역한 친일파 최양호의 연봉이 600원이었으니, 조희연이 받은 금전 대가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아직은 청나라가 강하다고 인식되던 1894년 상반기에 과감하게 일본군의 조선 주둔을 도운 대가로 그런 친일 재산을 축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재산은 오래가지 못했다. 국권침탈 얼마 뒤부터 그는 불어나는 채무를 감당하지 못해 재산이 압류되는 지경에 빠지게 됐다. 1911년 8월 21일 자 <순종실록 부록>은 전 황제인 순종이 이 때문에 특별 하사금 2500원을 주게 됐다고 말한다. 순종이 황제직을 잃는 데 기여한 조희연이 '염치 없게도' 순종으로부터 그런 돈을 받았던 것이다.

조희연의 재정 상태는 개선되지 않았다. <친일인명사전>은 "계속되는 채무로 재산을 탕진해 작위 유지가 어렵게 되자, 조선총독부는 체면 유지를 위해 작위를 반납하도록 종용"했다고 말한다.

결국 죽기 2개월 전에 남작 작위를 반납했다. 일본 귀족의 체면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빚더미에 올라 앉은 결과였다. 그래서 일반적인 친일 귀족들과 달리 조희연의 남작 작위는 상속되지 못하고 그의 대에서 끝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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