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에서 폭발한 화산, 살아남기 위해 벌인 사투
[양형석 기자]
극장가에는 가끔 비슷한 소재의 영화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할 때가 있다. 지난 1998년 5월과 7월 채 두 달도 되지 않는 시차로 개봉했던 소행성의 지구충돌을 소재로 만든 영화 <딥 임팩트>와 <아마겟돈>이 대표적이다. 물론 흥행성적은 1998년 세계흥행 1위(5억 5300만 달러)를 기록한 <아마겟돈>이 앞섰지만 8000만 달러의 제작비로 3억 49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린 <딥 임팩트> 역시 '가성비'가 상당히 뛰어난 영화였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그리고 이보다 1년 앞선 1997년에도 '화산폭발'이라는 같은 소재를 다룬 두 편의 할리우드 영화가 개봉했다. 먼저 2월에는 5대 제임스 본드로 유명한 배우 피어스 브로스넌과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사라 코너 역으로 널리 알려진 린다 해밀턴이 출연한 <단테스 피크>가 개봉했다. 1억 1600만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된 <단테스 피크>는 세계적으로 1억 78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 제작비 대비 만족할 만한 성적을 올리지 못한 <볼케이노>는 국내에서 서울39만 관객을 동원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
ⓒ 이십세기폭스 필름코퍼레이션 |
코믹-액션-드라마 연기 모두 가능한 배우
1964년 미국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에서 태어난 치들은 어릴 적부터 자주 이사를 다니며 덴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대학에서는 연기를 전공했다. 1982년부터 단역으로 출연하며 연기활동을 시작한 치들은 의학 드라마 < ER >을 비롯한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서 조·단역을 맡으며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치들은 1995년 덴젤 워싱턴 주연의 <블루 데블>에서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하며 조금씩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치들은 1997년 연기인생에 의미 있는 작품 두 편을 만나게 된다. LA의 비상대책반 직원 에밋 리스를 연기했던 <볼케이노>와 마크 월버그, 줄리안 무어와 연기호흡을 맞췄던 <부기 나이트>였다. <볼케이노>와 <부기 나이트>를 통해 관객들에게 익숙한 배우 중 한 명으로 자리 잡은 치들은 2001년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오션스 일레븐>에서 폭발물 전문가 베셔 타 역을 맡아 2007년 <오션스13>까지 시리즈를 개근했다.
치들의 인생작으로 꼽히는 작품은 훗날 <조커>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호아킨 피닉스와 함께 출연했던 2004년작 <호텔 르완다>였다. 치들은 <호텔 르완다>에서 100일 동안 1000명이 넘는 난민들을 보호한 호텔 지배인을 연기했다. 치들은 <호텔 르완다>를 통해 <레이>의 제이미 폭스(수상),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에비에이터>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같은 배우들과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물론 대중들에게 가장 익숙한 치들의 캐릭터는 따로 있다. 바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워 머신' 제임스 로즈 중령이다. <아이언맨1>에서 로즈 중령을 연기했던 테렌스 하워드가 하차하면서 새로 MCU에 합류하게 된 치들은 <아이언맨2>부터 <어벤저스: 엔드게임>까지 6편의 MCU 영화에 출연했다. 워 머신은 솔로무비나 드라마가 만들어진 주연 캐릭터는 아니지만 주로 아이언맨과 함께 다니며 화력을 지원했다.
워낙 주·조연을 가리지 않는 배우라 실제로 치들을 '조연 전문배우'라고 생각하는 대중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치들은 2012년부터 2016년까지 5개의 시즌이 제작된 드라마 <하우스 오브 라이즈>를 통해 2013년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작년 NBA스타 르브론 제임스와 함께 <스페이스 잼: 새로운 시대>에 출연했던 치들은 내년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공개될 마블 드라마 <시크릿 인베이전>에서 '워 머신'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 <볼케이노>는 LA 시내 한복판에서 화산이 폭발했다는 끔찍한 상상력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다. |
ⓒ 이십세기폭스 필름코퍼레이션 |
사실 흥행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화산폭발을 소재로 만든 두 영화 <단테스 피크>와 <볼케이노>는 모두 실패한 영화에 가까웠다. 1억 16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든 <단테스 피크>가 1억 7800만 달러, 9000만 달러의 제작비가 들어간 <볼케이노>가 1억 2200만 달러의 흥행성적에 머물렀기 때문이다(엄청난 홍보비가 투입되는 할리우드에서는 흔히 순제작비의 2배 정도를 손익분기점으로 잡는다).
하지만 국내 극장가에서는 <볼케이노>가 서울에서만 39만 관객을 동원하며 서울관객 25만의 <단테스 피크>보다 약 1.5배 정도 많은 관객을 불러 모았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눈 앞에 닥친 커다란 자연 재해 앞에 놓인 주인공들의 피난에 주목한 <단테스 피크>보다는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고 재난를 극복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주인공의 사투를 그린 <볼케이노>가 국내 관객들의 취향에 더 맞았던 셈이다.
< JFK >와 <도망자> <링컨>으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3번이나 이름을 올린 토미 리 존스는 19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상업영화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여러 작품에서 서브 주연으로 많이 출연했던 토미 리 존스에게 LA의 비상대책반장 마이크 록을 연기했던 <볼케이노>는 실질적인 첫 번째 단독 주연영화였다. 7명이 즉사한 수도관 안으로 들어갈 정도로 무모한 면을 가진 록 반장은 뛰어난 책임감과 임기응변으로 많은 생명을 구한다.
국내외 여러 영화들을 보면 인간의 사적 욕심이나 원한으로 일부러 재해를 일으키는 설정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볼케이노>는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재해에 맞서는 인간들의 사투를 그린 영화다. 따라서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캐릭터는 종종 나오지만 악의를 가지고 주인공을 방해하거나 재해를 더욱 키우는 '빌런'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주인공 일행이 사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경찰서장은 차가 막힌다는 이유로 끝까지 현장에 나타나지 않는다.
<볼케이노>를 연출한 믹 잭슨 감독은 지난 1992년 개봉해 서울에서만 74만 관객을 동원했던 케빈 코스트너와 고 휘트니 휴스턴 주연의 <보디가드>를 연출하며 이름을 알렸다. 1999년에는 미치 앨봄 작가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TV영화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로 미국 감독 조합상 TV영화부문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잭슨 감독은 2010년에도 클레어 데인즈가 출연한 TV영화 <템플 그랜딘>으로 에미상 작품상과 감독상을 휩쓸었다.
▲ <볼케이노>에서 여주인공 에이미 반즈 박사를 연기했던 고 앤 헤이시는 지난 8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
ⓒ 이십세기폭스 필름코퍼레이션 |
<볼케이노>에서 토미 리 존스가 연기한 마이크 록 반장이 경험이 풍부하고 임기응변에 능한 현장요원이라면 고 앤 헤이시가 연기한 캘리포니아 지질연구소 소속의 지질학자 에이미 반즈 박사는 이론에 능통한 인물이다. 언제나 재난의 가능성을 가장 먼저 인지하고 그 위험성을 록 반장에게 알려줬고 소방차와 헬기를 동원해 물을 한꺼번에 분사해야 용암을 막을 수 있다는 해결책을 제시한 인물도 반즈박사였다.
<볼케이노>에서 에이미 반즈 박사를 연기한 헤이시는 <볼케이노> 외에도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웩 더 독> <식스 데이 세븐 나잇> 등 1990년대 중·후반 여러 영화에 출연하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주연보다는 조연으로 꾸준한 활동을 이어가던 헤이시는 지난 8월 LA에서 건물을 들이받는 교통사고를 내며 뇌사판정을 받았고 향년 53세의 나이에 장기 기증을 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볼케이노>에서 록 반장은 13살 짜리 딸을 홀로 키우는 이혼남이다. 록 반장이 아끼는 딸 켈리는 재난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민폐 캐릭터'지만 병원에 도착한 후에는 자신보다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어른스런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켈리 역의 가빈 호프만은 <꿈의 구장>에서 케빈 코스트너의 딸 역으로 데뷔해 <나우 앤 덴>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 <와일드> 등 아역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재난상황이 발생하면 현장에서 구조작업을 하는 요원도 필요하지만 본부에서 현장과 적절한 소통을 주고 받으며 상황을 통제해주는 '컨트롤타워'도 반드시 필요하다. <볼케이노>에서는 돈 치들이 연기했던 비상대책반의 에밋 리스가 바로 그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었다. 평소에는 록 반장과 농담을 주고 받으며 친구처럼 지내지만 상황이 발생하자 에밋은 현장에 나간 록 반장과의 적극적인 소통으로 슬기롭게 상황을 대처하며 피해를 최소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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