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국가 제창 보이콧

박형수 2022. 12. 1.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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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수 국제부 기자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동방의 태양. 정의를 믿는 자들의 눈과 같이 빛난다… 인내하며 이어나가며 영원하리라.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여.’ 이란의 국가(國歌) 가사 일부다.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이 국가가 논란거리가 됐다. 이란 대표팀은 조별예선 1차전에서 조국의 국가가 울려 퍼지자 운동장 한가운데서 어깨동무를 한 채 입을 굳게 다물고 침묵했다. 국제 스포츠 경기에 출전한 대표팀의 ‘국가 제창 보이콧’은 흔치 않은 장면이다.

이란 대표팀은 2차전에서 ‘유럽의 복병’ 웨일스를 만나 2대 0으로 승리하며 ‘언더독(Underdog·스포츠에서 우승 확률이 적은 팀이나 선수) 돌풍’의 주인공이 됐다. 미국과의 3차전에선 비기기만 해도 조별 예선을 통과해 “카타르 월드컵에서 가장 먼저 16강 고지를 밟을 아시아 국가”라는 기대를 받았다.

강팀을 꺾고 고국에 예상치 못한 승리를 안긴 선수들은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르헨티나를 꺾자, 정부가 경기 다음 날을 공휴일로 선포했고 빈 살만 왕세자는 경기 중 부상당한 선수 이송을 위해 개인 제트기를 제공하며 파격 대우를 한 것이 좋은 예다.

이란 대표팀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3차전을 앞두고, 국가 제창을 또 거부할 경우 가족에게 폭력·고문이 가해질 수 있다는 이란 정부의 협박이 대표팀에게 전해졌다는 외신 보도가 나왔다. 영국 매체 ‘더 선’은 대표팀의 처형 가능성까지 거론했다. 이란은 결국 3차전에서 패배해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대표팀이 국가 제창을 보이콧한 건, 자국의 반정부 시위에 지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이란에선 지난 9월, 22세 여대생 마흐사 아마니의 의문사로 촉발된 시위가 석달 째 이어지고 있다.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지금까지 시위대 450여 명이 숨졌다. (이란 인권단체)

16강 진출엔 실패했지만, ‘위험한 용기’를 통해 자국의 반(反) 인권적 실태를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대표팀의 목적은 달성된 듯하다. 대표팀이 국가 제창을 거부했을 때, TV 카메라는 관객석에서 울먹이며 박수 치는 여성의 모습을 비췄다. ‘정의를 믿는 자들의 눈동자가 태양처럼 빛난다’는 국가의 가사는 누구보다 이들에게 잘 어울린다.

박형수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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