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숲과 상이암의 여의주 바위를 찾아서
[이완우 기자]
전북 임실군 성수산(聖壽山, 876m)은 고려와 조선 두 왕조의 창업 설화가 전해오는 상이암(上耳庵)을 품고 있다. 성수산 휴양림 주차장에서 2.7km의 오르막 숲길은 어느 계절에나 상이암의 여의주 바위를 찾아가며 숲길을 체험하기 좋은 산책로이다.
11월 하순, 숲은 산새 소리가 드물고 곤충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차가운 침묵의 계절을 준비하는 성수산 휴양림의 숲길은 걷는 내내 한적하였다. 색채가 단조로운 늦가을 숲의 청량한 바람결을 휘감는 물소리와 바람 소리는 몸과 마음을 더 맑고 편안하게 해 주었다.
▲ 성수산 휴양림 편백 숲 |
ⓒ 이완우 |
성수산 상이암은 고려와 조선의 창업 설화가 전해오는 생왕(生王) 기도처이다. 신라 말기 도선(827~898년) 국사는 이곳 암자로 모여드는 산줄기는 용(龍)이고 암자 앞의 거대한 바위는 여의주이니 구룡쟁주(九龍爭珠)의 명당이라 하여 팔공산(八公山, 1151m) 도선암(道詵庵)을 창건(875년)했다고 한다.
상이암의 여의주 바위를 이 지역 주민들은 구룡 바위라 하고 스님들은 향로봉(香爐峯)이라고 한다. 어느 등산 지도에는 화심(花心)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성수산 휴양림이나 왕의 숲은 이 상이암과 여의주 바위의 역사와 설화를 튼실한 씨줄과 날줄로 하고 있다.
구한말 임실군수 박시순(朴始淳, 1848~1907)의 운불일기(雲紱日記)에 그가 성수산 상이암을 방문한 기록이 있다. 상이암 계곡이 무성한 숲과 계곡을 덮은 너덜바위로 통행하기 힘들어 험애(險隘)로 묘사하였다. 지금은 상이암 여의주 바위의 바로 아래까지 승용차의 통행이 가능한 숲길이 열려 있다.
▲ 성수산 휴양림 본관 숙박동 신축 현장 |
ⓒ 이완우 |
상이암을 400m 앞둔 숲길 삼거리는 팔각정과 문화관광해설사의 집이 있는 휴식과 대화의 공간이다. 숲길 삼거리에서 상이암 입구까지 100m는 제법 가파르다. '여기는 기도 정진 수행 도량입니다.' 사찰 입구의 경건한 표어에 자세를 가다듬게 된다.
성수산은 졸참나무와 굴참나무 등 활엽수에서 떨어진 옅은 갈색 낙엽으로 온 산이 덮였다. 사찰 입구에서부터 상이암까지 300m 구간은 경사가 더욱 가팔라진다. 숲길 옆에 제법 큰 돌탑 두세 개가 방문자를 환영한다. 막돌을 허튼 쌓기로 다듬은 작은 돌탑들이 여기저기 생겨나고 있어 솟대처럼 방문객들이 정성과 기원을 느낄 수 있다.
숲길 오르막 끝에 당당한 바위가 치솟아 있다. 성수산 구룡쟁주(九龍爭珠) 지형의 화심(花心)인 여의주 바위이다. 바위는 가로 20m, 세로 40m의 마름모꼴 밑면에 높이 15m의 사각뿔 모양으로 웅장하다.
여의주 바위 아래쪽에서 오른쪽으로는 돌계단이 돌아서 오르고, 왼쪽으로는 포장된 숲길이 가파르게 바로 올라가서 험한 바위 지형 틈에 단정히 자리 잡은 상이암을 만난다. 여의주 바위는 상이암의 무량수전 앞 작은 개울 너머에 하늘로 향해 열려있다. 여의주 바위는 무량수전 건물 높이보다 높게 보인다.
여의주 바위 중턱까지 나무 데크가 설치되어 있다. 조심스레 올라가 바위 위에 앉았다. 소나무 한 그루가 일산(日傘)처럼 여의주 바위 위에 가지를 펼치고 있다.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강인한 성정의 소나무들 가지에 유난히 솔방울이 많다. 이 바위 위에 왕건과 이성계 장군이 앉아서 새로운 세상을 설계했을 장면과 포부를 상상해 본다.
성수산 상이암에는 왕건이 17세 때(894년)에 송악 호족 세력의 계승자로 이곳 팔공산 도선암에서 하늘에 기도하고 24년 후(918년)에 고려를 건국하였으며, 이성계 장군이 45세 때(1380년)에 남원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개선하는 길에 이곳에 들러 하늘에 기도하고 12년 후(1392년)에 조선을 건국하였다는 역사에 근거한 설화가 전해 온다.
이성계 장군이 조선을 개국한 후(1393년) 팔공산 도선암은 성수산 상이암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성계 장군이 이곳에서 기도할 때 하늘에서 '성수만세(聖壽萬歲)' 소리를 세 번 들었다고 한다. '성수(聖壽)'는 임금의 수명이니 곧 새로운 나라를 열라는 하늘의 계시였다. 상이암(上耳庵)'은 주상(主上)의 귀에 하늘에서 축원(祝願)이 들린 암자라는 의미이다.
▲ 상이암 여의주 바위 정상과 계곡 원경 |
ⓒ 이완우 |
산기슭의 낙엽 활엽수들은 잎이 다 떨어졌다. 멀리 보이는 나무들이 겨울을 준비하는 산짐승의 겨울털처럼 부드럽게 다가온다. 여의주 바위 위에서 멀리 펼쳐진 계곡을 살펴본다. 산 넘어 산들이 첩첩하고 안개가 낀 듯 자욱하여 수묵화를 이루었다.
이곳 성수산 상이암에 금강 발원지 뜬봉샘의 설화가 전해 온다. 이성계 장군이 이곳 팔공산 도선암에서 기도하는 중에 멀리서 무지개가 선명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장군이 말을 타고 달려가서 보니 맑은 샘이 있고 그 샘에서 봉황새가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샘을 뜬봉샘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장수군에도 이 뜬봉샘 설화가 전해 온다. 이성계 장군이 팔공산 계곡의 맑은 샘 옆에 상이암이란 막사를 짓고 기도를 하는 중 그 샘에서 봉황새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래서 뜬봉샘이라고 했다고 한다. 비슷한 두 설화가 이웃 지역에서 함께 전승된다.
임실군 성수산 상이암, 진안군 선각산(1,142m)의 섬진강 발원지 데미샘과 장수군 신무산(897m)의 금강 발원지 뜬봉샘 이 셋은 예로부터 장수 팔공산의 산자락에 있는 것으로 인식했다. 성수산, 선각산과 신무산 이 세 산은 진안고원의 지붕이 되는 장수 팔공산에서 직선거리 5km 이내로 서로 가깝다.
▲ 주차장에서 올려다본 웅장한 상이암 여의주 바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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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이암 여의주 바위 아래의 하늘로 솟아오르는 형태의 수직절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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