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중앙] '걸어서 정동 한바퀴' 개화기 건축물은 근대사 타임캡슐
대한제국에서 일제 강점기로 이어지는 한국 근대사는 아픈 역사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서구 문물이 유입되고, 봉건적 사회질서에 균열이 생기던 역동적인 시대이기도 했어요. 이 시대에 세워진 건물들은 오늘날에도 대한민국 곳곳에 남아, 그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죠. 소중 학생기자단이 근대에 지어진 역사적 건축물이 밀집한 서울시 중구 정동을 찾아 국권 침탈부터 신식 교육의 시작까지, 한국 근대사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살펴봤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절반 이상은 서구식 공동 주택 양식 중 하나인 아파트에 거주해요. 동네마다 교회나 성당이 있고, 도심에는 고층 빌딩이 빼곡히 서 있죠. 2022년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에게 이러한 서구식 건축 형태는 그리 낯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극이나 시대극을 보면 우리 조상들은 한옥이나 초가집에 살고 있으며, 오늘날과 같은 건축 형태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의 건축 양식이 이렇게 급변하게 된 분기점은 1876년 조선과 일본이 맺은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을 분기점으로 우리나라가 서양 문물의 영향을 받아 근대적 사회로 나아가던 시기인 개화기예요.
그중에서도 사전적 의미로 1876년의 개항 이후부터 1919년 3·1 운동까지를 뜻하는 근대(近代)는 우리가 꼭 들여다봐야 할 시기입니다. 근대에 교육 제도·건축 양식·종교 등 각종 신식 문물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과정은 당시 급변하던 세계정세는 물론,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에 흔적과 상처를 남긴 일제 강점기와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죠.
머나먼 옛날처럼 느껴지지만, 우리가 근대로 시간 여행할 수 있는 매개들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답니다. 근대에 건축된 건물들이 전국 곳곳에 남아있기 때문이죠. '근대유산 1번지'로 불리는 서울시 종로구 정동이 좋은 예죠. 소중 학생기자단은 서울시 중구에서 운영하는 '정동 한 바퀴 도보 탐방 프로그램'에 참여해 도심 속 근대 건축물과 함께 시간 여행을 떠나보기로 했어요.
길 위에서 만나는 격동의 한국 근대사
정동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 근대 서양 문물이 유입되고 수용되는 대표적인 공간이었어요. 1883년 미국공사관을 시작으로 1884년 영국, 1885년 러시아, 1889년 프랑스, 1891년 독일 등 각국의 공관이 들어서 외교의 중심지가 됐기 때문인데요. 이러한 열강들의 세력 다툼 속에 조선은 자주 독립국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고심했죠. 그래서 정동에 있는 근대식 건물들을 살펴보면 한국 근대사의 주요 사건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답니다. 소중 학생기자단은 이종석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근대에 정동에 지어진 건물들을 돌아보고, 이들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이 현재까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어요.
소중 학생기자단이 이 해설사와 처음 만난 곳은 국립정동극장이었어요. 이곳은 우리나라 근대식 공연문화의 요람이었으나 화재로 사라진 원각사의 복원이라는 역사적 의미와 근현대 예술정신을 계승하며 1995년 개관한 곳으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할 수 있죠.
준우 학생기자가 "일제 강점기 이전의 정동은 어떤 곳이었나요?"라고 질문했어요. "정동은 1396년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貞陵)이 도성 안 지금의 정동에 조성되면서 생겨났어요. 이후 정릉이 태종 시기 도성 밖으로 옮겨갔고, 정릉이 있던 곳은 정동(貞洞)이 됐죠. 정동에는 을사늑약부터 아관파천까지 한국 근대사에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여러 역사적 장소가 있어요."
가장 먼저 가볼 곳은 덕수궁 중명전이에요. 소중 독자 여러분은 조선의 궁궐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나요. 나무와 흙·기와를 사용해서 지은 경복궁 근정전이나 경회루 등이 생각날 텐데요. 하지만 경복궁의 집옥재와 같은 황실도서관으로 계획되어 1899년경에 건립된 건물인 중명전(수옥헌)은 우리가 알던 조선 궁궐의 모습과는 매우 다른, 서양식 외관을 하고 있죠.
무엇보다 중명전은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아픔이 서린 역사의 현장으로도 잘 알려져 있어요. 20세기 동아시아에서는 열강이었던 일본·청·러시아가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했어요. 대한제국은 외교를 통해 주권을 유지하려 하였으나,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미국과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영국과는 제2차 영일동맹을 맺어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우위를 확인받은 뒤, 을사늑약을 체결했죠. 전시실로 들어서니 1905년 11월 17일 저녁 8시부터 18일 새벽까지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상황을 재현한 현장이 보였어요.
승현 학생기자가 "그런데 왜 조약이 아니라 늑약이라고 하나요?"라고 물었습니다. "불법적인 방법으로 강제 체결했기 때문이죠. 조약 체결을 위해 파견된 특파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15일 고종에게 을사늑약에 대한 동의를 받아내고자 했지만, 고종은 이를 끝까지 거부했죠. 결국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하에 대한제국 대신들이 조약 동의를 강요받았어요. 하지만 참정대신 한규설은 끝까지 조약 동의를 거부했고, 결국 중명전 마루방에 감금됐죠. 을사늑약이 체결될 당시 중명전은 무장한 일본 군인과 경찰들이 둘러싸고 있었던 강압적 분위기임을 감안하면 대단한 용기죠."
덕수궁에는 중명전 외에 나무·흙과 같은 조선의 전통 건축 재료가 아닌 돌로 만든 서양식 황궁인 석조전과 전통식 지붕에 서양식 기둥이 접목된 독특한 건축 양식을 채택한 정관헌도 있어요. 모두 전통적인 조선 궁궐의 외양과는 거리가 있는 건물들로, 서구 문물이 본격적으로 유입됐던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죠.
이렇듯 근대 서구식으로 지어진 건물이 역사적 사실과 관련 있는 경우는 또 있어요.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지기 위해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세운 독립문과 정관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자로 추정되는 건물이라는 점입니다. 사바틴은 1883년 조선에 입국해 다수의 근대 서양식 건축물을 설계했죠.
사바틴이 설계한 한국 근대사에 중요한 건물이 또 하나 있는데요. 바로 정동에서 제일 높은 정동공원 위쪽에 있는 구 러시아 공사관이에요. 1890년(고종 27) 사바틴이 설계한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로, 1884년 러시아와 조선이 맺은 조로 수호 통상 조약으로 두 나라 간의 외교관계가 성립된 후 건립됐죠. 하지만 6.25 전쟁을 거치며 대부분 파괴됐고, 우리가 보는 하얀 탑의 형태는 사실 공사관 건물의 일부인 전망탑입니다. 이 해설사가 소중 학생기자단을 구 러시아 공사관 건물이 있는 정동공원으로 이끌었어요.
"구 러시아 공사관은 고종이 1896년 일본의 무력 압박을 피한 아관파천과 관련 있어요. 당시 고종의 비 명성황후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청·러시아 등을 이용하려 했어요. 이런 명성황후가 눈엣가시였던 일본은 조선 고종 32년(1895) 경복궁을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한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킵니다.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왕세자와 함께 일본 몰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죠. 이것이 바로 아관파천이에요.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 정도 생활하면서 자주적 개화를 준비했고, 1897년 경운궁(덕수궁의 옛 이름)으로 환궁한 뒤 대한제국을 선포했죠."
이처럼 근대 정동은 열강들이 힘겨루기하는 각축장이자, 세계 각국에서 온 외국인으로 붐비는 거리였어요. 독일 여성 손탁이 정동에 건립해 운영한 손탁 호텔은 대한제국을 찾은 중요한 외국 손님을 맞는 역할을 했죠. 손탁은 1885년 초대 주한 러시아공사 베베르를 따라 한국에 들어온 뒤, 궁내부에서 외국인 접대업무를 맡으며 고종과 명성황후와 친분을 쌓았어요. 그 덕분에 손탁은 1895년 서울 정동에 한옥 한 채를 하사받았고, 1898년 손탁 빈관을 지었죠. 이후 1902년 손탁 빈관을 2층으로 된 벽돌 건물로 다시 지어 외국에서 온 귀한 손님을 맞는 정부 직영 영빈관 격으로 운영했어요.
신식 호텔·교육·종교까지…변혁의 중심 정동
손탁 호텔은 한성에 있던 열강의 외교관들이 모이는 사교 공간이기도 했어요. 1층에는 일반 객실과 서양식 레스토랑과 카페, 2층에는 귀빈용 객실이 있었죠. 또한 손탁 호텔에는 프랑스어·이탈리아어·스페인어·영어 등 각종 외국어 구사자가 있었고, 짐꾼·승마 등 각종 서비스가 가능했어요. 지금은 손탁 호텔 터라고 적힌 비석만 남아있습니다.
시윤 학생모델이 "정동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기관인 배재학당,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 이화학당 등이 있었던 교육의 중심지라고 들었어요"라고 말했어요. "맞아요. 그중 한 곳인 이화학당에 대해 지금부터 알아볼 겁니다." 이 해설사가 소중 학생기자단을 손탁 호텔 터 바로 옆에 있는 서울 이화여고 심슨 기념관 앞으로 데려갔어요. "이곳은 미국인 사라 J 심슨이 죽을 때 위탁한 기금으로 1915년 건립됐고, 현재는 이화박물관으로 사용 중인 건물이에요."(이)
1885년과 1886년은 한국 근대 교육사에서 매우 중요한 연도였어요. "1885년에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 기관인 배재학당이 미국인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에 의해 설립됐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을 비롯해, 민족시인 소월 김정식, 한글학자 주시경, 독립운동가 지청천 장군 등이 모두 배재학당을 거쳐 갔어요."(이)
여성이 최초로 근대식 교육을 받게 된 것 역시 이 시기의 일입니다. 1886년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이 설립됐기 때문이죠. 유교가 통치 이념이었던 조선에서는 여성을 위한 교육은 주로 일부 양반계급에 국한돼 있었으며, 이마저도 가정에서 사적으로 주로 이뤄졌죠. 이들 소혜왕후가 부녀자의 훈육을 위해 편찬한 『내훈』, 이황이 저술한 여성 교훈서인 『규중요람』, 글과 그림으로 충신·효자·열녀의 행적을 기록한 『삼강행실도』 등을 주로 배웠는데, 그 내용은 주로 여성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와 살림법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어요.
"19세기 말의 한국 사회 역시 봉건적 사회체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여성을 위한 근대 교육 기관은 전무했어요. 이런 상황 속에서 1882년 조선이 미국과 수호조약을 맺고 외교관계를 수립하자, 미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의료와 교육을 통해 선교할 목적으로 조선을 찾았죠. 이화학당은 미국 공사관이 자리 잡은 정동에 있던 정동예배당 옆 여학교에서 출발했어요." 이 해설사가 한옥 교사 시절 이화학당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줬죠. 처음에는 한옥 건물이었지만, 학생들이 날로 늘어나 한옥 교사를 헐고 붉은 벽돌의 2층 양관인 메인홀을 지었죠. 당시 완공된 메인홀은 강당·선교사 기숙사 건물·기숙사방 14개·교실·사무실·회계실·부엌뿐만 아니라 식당·목욕실·세탁실·응접실·별실까지 갖춘 최신 건물이었어요.
소중 학생기자단은 이화학당의 역사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심슨 기념관 내부에 있는 유관순 교실로 향했죠. 여러 개의 책상과 걸상이 있는 교실의 뒷벽에는 이화학당 학우들과 함께 있는 학생시절 유관순 열사의 모습이 사진으로 크게 걸려있었어요. 이 해설사가 열사의 사진을 가리키며 "대한민국 여성 독립운동 유공자 최초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된 유관순 열사 역시 생전 이화학당에서 수학하였어요"라고 말했어요. 사진을 유심히 살피던 예슬 학생기자가 "이화학당에서는 무엇을 배웠나요?"라며 궁금해했죠.
이화학당에서 여학생들에게 가르친 최초의 과목은 영어였어요. 가장 먼저 입학한 김부인은 3개월간 영어를 배우다 돌아갔으며, 두 번째 학생은 성경을 배웠죠. 교사가 보충될 때마다 가르치는 교과목도 하나씩 늘었는데요. 한글 교육은 1889년 한국인 여교사 이경숙이 들어오면서 시작됐어요. 또 1891년에는 성악과 오르간을, 1897년에는 합창을 가르쳤죠. 1893년에는 학부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체조를 정규 교과과정으로 채택했어요. 보수적이었던 당시 시대상을 생각하면 매우 파격적인 행보였죠.
최초의 근대 여성교육기관답게 이화학당에서는 여러 자랑스러운 동문을 배출했어요. 유관순 열사 외에도 이화학당 대학과 1회 졸업생 신마실라는 사업으로 모은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기부했고, 상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원 참사로 활약했던 이화학당 대학과 출신 이화숙은 상해 대한애국부인회 회장이 되어 독립자금도 모금했어요. 여성의 권익옹호 및 항일 구국 운동에 힘썼던 황애시덕은 3년간 옥고를 치른 뒤 여성계몽운동과 농촌 계몽운동에 헌신했죠.
1886년 설립된 이화학당을 필두로 전국 각지에는 여학교들이 설립되기 시작했어요. 평양에는 정의여학교(1893), 부산에는 일신여학교(1895), 제물포에는 영화여학교(1897), 개성에는 호수돈여학교(1904)가 건립됐죠. 여성이 근대식 교육을 받기까지는 이렇게 많은 과정이 있었답니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공통점은 개신교 선교사가 설립한 신식 교육기관이라는 점입니다. "배재학당을 세운 아펜젤러 목사는 정동제일교회의 창립자이기도 해요." 이 해설사가 소중 학생기자단을 심슨기념관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인 정동제일교회로 이끌었습니다.
정동제일교회 마당 한쪽에는 창립자 아펜젤러 목사의 흉상이 있었죠. 1885년 한국에 개신교 선교사로 파송된 그가 정동에 사저를 마련하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이 교회의 시초예요. 이후 아펜젤러 목사는 1887년 예배를 볼 수 있는 교회용 건물을 마련해 벧엘예배당이라는 이름을 지었죠.
정동제일교회는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학생들이 많이 활동하던 곳이기도 했어요. 이승만 전 대통령, 『독립신문』을 발간한 서재필, 한글 대중화를 이끈 국어학자 주시경 등이 이곳에서 활동했죠. 19세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한 유관순 열사의 장례식이 거행된 장소도 정동제일교회였어요.
참고로 16세기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해나간 성공회도 고요한 주교가 1890년 9월 29일 인천항에 도착하여 서울과 경기도 그리고 충청도 지방에 전도를 시작했어요.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도 정동에 있는데, 한국 전통 기법을 접목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설계된 외관이 특징이죠. 내부에 있는 11년에 걸쳐 제작된 모자이크 제단화는 조명에 의해 황금빛으로 빛나는 화려함이 돋보이는데,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그 가치가 높아요.
마지막으로 살펴볼 곳은 서울시립미술관입니다.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 속에 뒤바뀐 건물의 주인이 인상적인 장소죠. "이곳은 조선 말 개화기 때 평리원(한성재판소)이 세워졌던 곳이에요. 하지만 일제가 1928년 이 자리에 우리나라 침탈 기반 시설로서 경성재판소를 세웠죠. 지금도 건물 앞쪽의 정초석을 살펴보면 당시 총독이었던 사이코 마코토의 글씨체가 남아있는 걸 볼 수 있죠." 경성재판소 건물은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의 대법원 청사로 사용하다 2002년부터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으로 사용 중이에요. 법원에서 미술관으로 용도가 바뀌면서 건물 형태에도 변화가 생겼죠. 전면부(파사드)만 문화재로 등록된 원형이며, 나머지 부분은 철거 후 모두 새롭게 신축된 건물입니다.
지금까지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간직한 건축물들을 살펴봤어요. 고풍스러운 양식의 이 건물들은 살아있는 박물관이자 역사 교과서 그 자체죠. 아파트와 고층 빌딩이 가득한 서울 한복판에 100여 년 전 건물들이 여럿 남아있는 이유랍니다. 한국 근대는 정치·교육·문화 등 사회 전반에서 엄청난 변혁이 이뤄진 시기인 만큼, 오늘날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해요. 역사란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여주는 창이니까요. 을사늑약이나 아관파천, 신식 교육기관의 설립, 새로운 종교의 유입 등을 교과서나 책으로만 접하면 딱딱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렇게 당시 사람들이 누볐던 거리에 있는 건물에 들어가 살펴보면 더욱 생생하게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답니다.
■ 전국 각지에서 만나는 근대건축물 시간 여행
「 건축사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근대에 지어진 건축물들은 지금도 전국 각지에 남아있어요. 이러한 건물들이 모여있는 곳을 테마 여행 코스로 만나볼 수 있는 지역들을 소개합니다.
부산 근대건축물 시간 여행
부산광역시 동구에는 일본식부터 서양식까지 한국 근대에 지어진 여러 종류의 건축물이 보존돼 있는데요. 우리나라 최초의 성형외과 전문의를 취득한 인물인 최용해가 1921년 초량에 설립한 옛 백제병원은 고풍스러운 아치형 입구가 특징이죠. 또 일본인 건축가에 의해 1918년에 지어졌으며, 화강석 돌림띠와 붉은 벽돌 등 전형적인 일본 건축의 형식을 따른 한성 1918(구 한성은행 부산지점), 부산 최초의 근대적 물류창고로 설립돼 해방 전까지 명태창고로 활용된 남선창고, 부산 최초의 근대식 여학교 부산진일신여학교 등을 만날 수 있어요.
진해 근대역사문화공간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계획도시인 진해의 도시 평면과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 이후 근대 도시 경관과 건축 유산이 집중적으로 보존되고 있어요. 이에 진해 원도심은 2021년 등록문화재 제820호 '진해 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 지정됐죠. 대각선(방사선) 가로체계에 따라 도로 모서리에 자리하여 뾰족집의 형태로 유연한 공간 활용의 모습을 보여주는 육각집, 창선동 근대상가주택, 대흥동 근대상가주택과 현재까지도 군사 행정도시의 생활 모습이 남아 있는 구 태백여인숙, 황해당 인판사, 일광세탁 등 10건의 문화유산은 근대 도시의 변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요.
군산 근대문화유산 투어
전북 군산시에서도 건축물을 매개로 시간 여행할 수 있어요. 이영춘 가옥은 1920년경에 일본인 대지주 구마모토가 지은 별장으로 서구식과 일본식, 한식의 절충양식 건물이죠. 해방 후에는 개정병원 원장이었던 이영춘 박사가 거주하면서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됐어요. 군산 지역에 최초로 건립된 천주교 본당 건물인 둔율동 성당은 건립 당시의 기록을 잘 정리한 ‘성전신축기’ 등이 보존되어 있어 당시 건축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이외에 일제강점기 전라도 농산물을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하는 중요 교통로의 역할을 담당한 수탈의 아픈 역사를 지닌 임피역사, 대륙진출의 야망을 가진 일본의 정략적인 목적에 의하여 1912년 건설된 어청도 등대도 볼 수 있어요.
인천 개항장 역사문화의 거리
부산과 원산에 이어 세 번째로 개항한 도시인 인천도 130여 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 있어요. 바로 인천 개항장 역사문화의 거리입니다. 구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 건물은 개화기 인천의 문물을 전시하는 인천개항박물관으로, 개항장 주변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의 사교장이었던 구 제물포구락부는 옛 모습을 재현한 문화공간으로 활용 중이죠. 또 대불호텔 전시관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어요. 우리나라 우정 업무가 처음으로 시작된 곳 중 하나인 중동우체국도 인천 개항장 역사문화의 거리 코스에서 꼭 들러봐야 할 곳이에요.
대구 근대문화골목
대구광역시에도 근대문화의 발자취가 담긴 건축물들이 테마인 여행 코스가 있죠. 거리는 약 1.64km로 비교적 짧지만, 볼거리가 많아요. 가곡 ‘동무생각’의 노랫말 배경이 된 곳으로 유명한 동산 청라언덕, 경상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인 계산성당, 건물 전체에 근대의 고딕양식이 잘 나타나 있어 근대 건축물 연구에도 큰 의의가 있는 구 제일교회,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국권 회복을 꿈꿨던 민족 운동가 서상돈 선생의 고택, 근대에 들어 대구 중구 종로에서 포목업·건축업·요식업 등을 하며 경제적으로 정착했던 화교의 역사가 담긴 화교협회(소학교) 등이 대표적이죠.
」
■ 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 취재 전에는 우리나라 근대사를 잘 알지 못했어요. 이번 취재를 통해서 정동길에 있는 여러 의미 있는 장소들에 대해 알게 되었죠. 가을 분위기로 가득한 정동길은 그야말로 근대의 역사가 모여있는 곳이었어요. 덕수궁, 구 러시아 공사관, 이화학당, 배재학당 등 우리나라의 역사적 장소들을 살폈죠.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에는 그 당시 상황들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어서 안타깝고 슬펐어요. 이화여고 심슨기념관에서 이화학당이 배출한 인재들에 대해서도 들었는데, 독립운동을 했던 유관순 열사도 이곳을 다니셨다고 해서 놀랐어요. 유관순 열사와 현재의 내가 장소로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었죠. 평소 역사에 큰 관심이 없고 어려워서 이번 취재가 조금 걱정되었지만, 역사를 단지 책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어서 재미있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어요. 여러분도 정동을 한 바퀴 산책해 보세요. 많은 지식과 역사를 알아가는 즐거움도 함께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문시윤(서울 상명초 5) 학생모델
예전에 정동을 한 번 가본 적 있는데, 이종석 해설사님과 동행하니 더 특별하게 느껴졌어요. 정동에 이렇게 많은 역사가 숨어있는지는 몰랐거든요. 저는 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데 쉽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셔서 더 재밌었어요. 정동의 분위기도 좋았고, 저희가 둘러본 건물들도 다르고 다양해서 신기했어요. 저는 서울 이화여고 심슨 기념관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독립을 위해 싸웠던 많은 분들이 이화학당을 다니셨대요. 정말 대단하고 존경스럽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건 별로 재미가 없었는데 이렇게 탐방하면서 배우니깐 정말 좋고 재미있어요. 앞으로도 이런 시간을 마련하면 의미 있고 역사도 아는 새로운 시간이 될 것 같아요. 정동 도보 탐방 정말로 추천합니다.
이예슬(서울 매헌초 5) 학생기자
정동 도보 탐방 프로그램을 통해 취재한 장소 중 하나인 중명전은 예전에 두어 번 가봤던 곳이에요. 그때는 정보 없이 돌아다니기만 해서 중명전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었는데, 이종석 해설사님과 함께 다니면서 모르고 있었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됐어요. 중명전 외에도 정동에 있는 다른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장소에도 가봤어요. 대표적으로 정동제일교회, 구 러시아 공사관 등이 있었는데 한국전쟁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소실된 곳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평소 그냥 지나다니던 길이 역사를 품고 있었다는 사실에 흥미로웠어요. 이번 취재를 계기로 서울의 또 다른 역사적인 장소는 어디인지 궁금해졌어요.
이준우(서울 상명사대부초 6) 학생기자
은행잎이 가득해서 가을에 더욱 아름다운 정동은 우리의 근대문화유산이 많은 곳이에요. 정동 도보 한 바퀴 취재를 통해 한국 근대 정치·문화·사회의 격변 중심지를 방문하여 우리의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어요. 을사늑약을 체결했던 덕수궁 중명전을 방문했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정중앙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어떻게 우리가 주권을 빼앗기게 되었는지 되새기며 가슴이 아팠지만, 개방의 시대를 맞이하여 교육기관에서 인재를 양성하고, 이를 통해 오늘날의 경제 대국을 이룩한 현재의 모습에 가슴이 또 벅차오르기도 했어요. 우리에게는 아픈 역사도 있지만 선조들의 노력으로 행복한 현재의 모습이 있고, 열심히 노력하는 저와 소중 친구들이 있어 더 멋진 미래가 기대됩니다.
홍승현(경기도 불곡초 5) 학생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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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성선해 기자 sung.sunhae@joongang.co.kr, 사진=배재준(오픈스튜디오)·서울특별시 중구청·서울기록원·군산시청·인천광역시 중구청·대구광역시 중구청·창원시청·부산광역시 동구청, 동행취재=이예슬(서울 매헌초 5)·이준우(서울 상명사대부초 6) 학생기자, 문시윤(서울 상명초 5)·홍승현(경기도 불곡초 5) 학생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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