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회귀와 환생

전영선 2022. 11. 28.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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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선 K엔터팀 팀장

현재의 정신과 지식을 유지한 상태에서 시간을 이동해 인생 다시 살기. 요즘 콘텐트 업계의 화두, 회귀물(回歸 物)의 골자다. 주인공은 어느 날 눈 떠 보니 다른 시간이나 차원으로 이동해 있고 이내 적응해 맹활약하게 된다.

방송 시작과 동시에 화제몰이 중인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도 2017년 연재를 시작해 대성공을 거둔 회귀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어른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기업 소설에 새로운 자양분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완결된 지 4년이 넘었지만, 아직 이만한 기업 소설이 없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풍성한 디테일을 자랑한다. 뉴스를 관심 있게 본 사람이라면 바로 어떤 사건을 뼈대로 하는지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구성이 탄탄하다.

2010년대 중반 이후 회귀 장치는 대중소설 트렌드를 압도해왔다. 물론 무협지 시절에도 회귀나 환생을 소재로 한 작품은 존재했다. 하지만 당시엔 소수 취향으로 분류됐다. 현재의 회귀물은 양대 웹소설 플랫폼(카카오페이지·네이버 시리즈) 순위를 지배한다. 지난해 연재를 시작해 3억5000만번 열람된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이나 드라마화를 계기로 다시 상위권으로 뛴 ‘재벌집…’은 이중 극히 일부다. 로맨스(‘악녀는 마리오네트’)나 의학소설(‘외과의사 엘리제’)을 회귀와 섞는 등 기상천외한 설정이 쏟아져 나온다.

회귀의 인기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이 현상과 가장 잘 통하는 것은 ‘이번 생은 망했다’(이생망) 정신일 것이다. 열심히 살아온 회귀 소설의 주인공에겐 희망도 미래도 없다. 하지만 인생을 리셋하면 승산이 생긴다. 공무원 시험 낙방생은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시청 기억을 살려 데뷔에 성공하고, 묻지마 살인 피해자인 여성은 황녀로 태어나 권력을 잡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제자리인 현생의 낙담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장치가 바로 회귀다.

드라마 ‘재벌집…’ 방송 중 시청자 댓글 창이 가장 폭주한 순간은 진도준(송중기)이 (신도시 지정 전) ‘분당 땅’을 달라고 하는 장면이었다. 이때 너도나도 당시 샀어야 할 종목을 외치기도 했다. ‘한강의 기적’이 끝난 자리, 회귀가 저성장 시대의 해법을 찾지 못한 세대의 숨구멍 역할을 하고 있는 역설을 보여준다.

전영선 K엔터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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