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모든 찰나가 꽃이란 걸 알게 되었다

안준철 2022. 11. 27.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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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영 시인의 첫 시집 <북에 새기다> 를 읽다

[안준철 기자]

 
 성미영 시인의 시집 <북에 새기다>
ⓒ 시와에세이
 내가 기다리는 님은/ 늘 젖은 몸으로 온다/ 먹구름 깔리고/ 눈비 내리는 날들 지나/ 세월의 풍화 속/ 녹슨 뼈 바랜 얼굴/ 당신을 부여잡고/ 놓지 않는/ 당신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내게 의지하는 그 간절함으로/ 외줄에서 견디는 - 빨래집게 (북에 새기다, 2020)

시 제목이 빨래집게인 것이 다행이다. 하지만 시의 특성상 빨래집게가 누군가의 은유라면? 늘 젖은 몸으로 오는 님을 기다리는 사람이든지, 젖은 몸으로 외줄에서 견디는 바로 그 사람이든지. 어느 쪽이든 괴롭고 힘든 삶일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시가 시인의 마음 안 가장 어둡고 힘들고 큰 상처들이 세상에 드러나는 하나의 통로(박혜연 시인의 추천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시를 쓸 수 있는 훌륭한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성미영 시인의 첫 시집을 두 번 읽었다. 시집이 손에 들어온 그날 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아침에 읽을 때는 제 4부부터 거꾸로 읽었다. 4부에는 시인의 개인사와 관련된 시가 몇 편 수록되어 있다. 그 중 한 편은 이렇게 시작된다.

죽음의 순간을 자주 경험하는 일은 / 생의 모든 찰나가 꽃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일이지 -간뇌에게 부분

성 시인은 오래 전에 미끄러운 바닥에 나자빠져 생명의 중추에 큰 손상을 입은 적이 있다. 그 한 순간의 일이 시인의 반평생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버린다. 그로 인해 끝을 알 수 없는 불안으로 이어져/아침이면 죽어 있을 것 같은 공포감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무려 50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그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어지는 시 '중독'은 약의 중독을 의미한다. 성 시인은 "한 알 먹으면 감쪽같이 잠들 것 같아/ 공포의 늪에서 빠져 나오려다/ 어느새 약의 유혹에 길들여지고 말았다"고 얘기한다. "먹지 않아도 된다는 판정에도/ 먹지 않았던 본래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 세월이 무려 50년이다. 너무도 오랜 세월을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 어쩌면 그리도 밝고 긍정적일 수 있을까.

내가 성 시인을 처음 만난 것은 십여 년 전의 일이다. 순천작가회의가 주최한 문학아카데미에서 였을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성 시인에게서 어두운 기색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조금 심하다고 느껴질 만큼 늘 밝은 기운에 차 있었다. 반평생을 한 계단 한 계단 밟으며 죽은 듯 산 듯 살다가 세상에 나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한 시기였으니 그녀의 과도한(?) 명랑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박혜연 시인은 추천사에서 "화사한 봄날 같은 성격으로 주변을 빛나게 하는 시인이 들려주는 개인적, 사회적 아픔은 시어라는 날개를 달고 싱싱한 생명으로 도약하고 있다"라고 적고 있다. 도약이 어느 정도일까? 복효근 시인은 추천사에서 이렇게 썼다.

"그렇게 도달한 생명 인식은 자신을 포함하여 뭇 생명과 역사로 확대된다. 시인의 시는 생명을 억누르는 모든 억압기재를 거부한다. 소외되고 부당하게 죽어간 약자에 대한 연민과 연대의 노래가 그의 시다."

이제 성미영 시인의 시를 한 편 정독해보기로 한다. 4부에 실린 시다.
 
숨을 쉬는 것만으로
선을 행하는 거였어요
죽어서도 종이로 남은 하얀 몸뚱이
누군가와 당신이 역사로 이야기하는
수많은 언어, 문득
숲이 그리워져요
 
가만히 서서 한 여름의 뙤약볕을 견디는 일
당신을 생각하면 울컥해져요
죽어서도 남긴 당신의 부드러운 몸
엎질러진 기름을 닦다가
더러움까지 안고 가는 당신을 생각해요
숲으로 달려가 한 그루 나무가 되고 싶어요
 
성자(聖子)처럼 눈보라를 건너는 당신
견고한 정신 안으로 새긴 무늬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시를 쓰다가
그 많은 생각 보듬은 책장을 바라봐요
끝없이 자신을 지우며 살아나는 당신
 
나를 없애며
끊임없이 나로 살고 싶은 나
 
나, 무에요
-'나, 무(無)' 전문

 
시인은 시로 말해야 한다. 살아온 삶의 내용이 아무리 곡진하고 훌륭해도 그것이 시로 전이되지 않으면 좋은 시인이라는 말을 듣기는 어렵다. 이것이 언어를 다루는 시인의 숙명이다.

성 시인과 나는 한 때 시를 배우고 가르치는 스승과 제자 사이이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동료 시인이 되었고, 지금은 거꾸로 내가 성 시인에게 습작시를 보내어 한 수 가르침을 받기도 한다. 자칭 산책가인 나는 늘 나무에게 빚을 지고 살고 있지만 아직까지 나무에게 이런 멋진 시를 바치지는 못했다.

성 시인이 첫 시집에는 안타까울 만큼이나 너무나도 많은 아픔과 슬픈 사연이 담겨 있다. 개인적인 아픔보다 사회적 혹은 국가적(폭력으로 인한) 아픔이 압도적으로 많다. 성 시인이 여수 출신 시인이요, 지금도 여수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현대사의 비극이자 지역의 비극이기도 한 '여순'의 아픔을 비켜가지 않고 낱낱이 기록하고 시로 승화시키는 것도 시인의 몫이 되었다.

'서대 단상'은 "눈이 한쪽으로 쏠려 있다는 이유로 납작 엎드려 있어야 했던/ (중략)/ 옳고 그름의 가치가 한 방향으로 기울어진" 어두운 세월을 이야기하고 고발한다. 그 어둠의 역사는 여순 사건으로 인해서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이라는 무시무시한 법의 지배 아래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황선열(문학평론가)는 시집 해설에서 "한쪽으로 기울어진 이념 때문에 채반에서 꾸덕꾸덕 말라가는 서대처럼 죽어갔던" 사람들을 상기시키면서도 "그러나 그 바닷가 사람들의 삶이란 그렇게 쉽게 무너지는 삶이 아니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아서 과거를 기억하고 새로운 삶을 기약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성 시인의 시 '꽃게를 마주하고'를 그 한 예로 제시한다.
 
게딱지 같은 인생이라고 말하지 마라 생각이 굳어질 때마다
허물처럼 벗어던지며 탱글탱글 다져온 속아지를 아느냐 옆으로
슬슬 피해다닌다고 비겁하다 말하지 마라 힘 없는 것들은
살아남기 위해 퇴로가 필요할 뿐이다/ (...) / 부딪치는 것보다
피하는 것이 상책일 때가 있는 법/ (...)/ 이거다 싶으면
목숨 걸고 놓지 않는 끈질긴 투지를 아느냐 결정적인 순간에
몸의 일부라도 구하는 용기, 이 얼마나 중요한 덕목이더냐
-<꽃게와 마주하고> 부분

 
서대단상, 인어밥상, 뻘낙지, 뻘기미, 장어를 만나다 등의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시집 제 1부에 실린 시들은 마치 어류도감을 읽는 것과 같은 서술방식을 보여준다. 하지만 성 시인의 시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이를 통해서 가족들과 민중들의 삶을 보편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황선열).
 
죽어서도 진한 향기로 남는다는 건/얼마나 잘 살아낸 생인가//바위에 몸을 기대고 벌집 같은 집을 지어/흘러가는 구름 한 조각 들여놓고/밀려드는 물결 한 자락 새겨놓고/겹겹이 껴입은 누더기로 풍파는 견뎌낸 생/바다는 몸으로 황홀하고 진한 향을 남기는/어머니, 화석(化石)이 된 석화(石花)
-'어리굴젓' 전문

 
성 시인은 창과 민요에도 능하다. "나를 때려 단련하는 일/ 살갗이 닿고 뼈가 닿고 마음이 없어질 때/ 진정한 나에 이른다(고명敲銘-북에 새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더 좋은 시인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두드리고 또 두드리"며 정진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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