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발에 꼭 맞는 수제화, 이제 못 신으면 어떡하죠 [우리 도시 에세이]
오랜 시간 삶의 ‘흔적’이 쌓인 작은 공간조직이 인접한 그것과 섞이면서 골목과 마을이 되고, 이들이 모이고 쌓여 도시 공동체가 된다. 수려하고 과시적인 곳보다는, 삶이 꿈틀거리는 골목이 더 아름답다 믿는다. 이런 흔적이 많은 도시를 더 좋아한다. 우리 도시 곳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그곳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기쁘게 만나보려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내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신고 산다는 게 참으로 어려운 일처럼 여겨진다. 동남아에 전래하는 '원숭이 신발'이라는 우화가 있다. 공짜 신발에 길들인 원숭이가 맨발로는 걸을 수 없게 되어, 신발 때문에 가진 모든 것을 내어주는 처지로 전락하고 만다는 이야기다. 이는 제국주의 침략을 비판하기도, 면면히 이어오던 풍습을 신문물이 대체하는 현상을 빗대기도 한다.
▲ 성수동 수제화 거리 서울 지하철 2호선 성수역 2번 출구에 있는 성수동 수제화 거리 상징. 이 길을 따라가면 지하철 역사 하부 공간을 활용한 수제화 매장을 만날 수 있음. |
ⓒ 이영천 |
구두가 일반화된 건 한참 뒤이나, 식민지 시대 비교적 소득수준이 높은 계급에선 구두를 신었다. 신문 광고 등으로 미루어, 상당한 고객층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구두와 관련된 도시 공간의 형성은 재료 수급에 기인한다.
재료 수급이 수월한 곳에서 초기 신발산업이 태동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성장하여 기업화한 공장의 이동 경로를 따라 공간구조 천이가 일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구두나 고무신은 우리에겐 마치 원숭이 신발 같은 존재였다.
염천교에서 탄생한 구두공방
1925년 개장한 서울역 부속시설로 여러 창고가 있었다. 이중 가죽을 보관하던 창고에서 하나둘 물품이 빼돌려진다. 이 가죽은 훌륭한 구두 재료였다. 서울역 북쪽 염천교 부근에 수제화를 제작하는 솜씨 좋은 기술자들이 자연스레 모이기 시작한다. 수제화 거리 생성이다.
▲ 염천교 수제화(1967) 염천교 건너 좌측으로 그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 남아 영업하고 있는 수제화 매장과 공방, 공장 건물이 보임. |
ⓒ 서울역사박물관 |
▲ 염천교 수제화 상가 수제화의 시초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염천교 수제화 상가. 대규모 서울역 북부 역세권 개발사업 압력에도 살아 남아, 존치할 수 있게 되었다. |
ⓒ 이영천 |
지금은 채 100여 곳 남짓의 수제화 공장과 상점뿐이다. 염천교 수제화 거리는 서소문 역사공원 남측에 흔적으로 남아있다. 1층은 매장으로, 2~4층은 공방과 공장이다. 이 상점가는 다행히 대규모 '서울역 북부 역세권개발' 압력에도 살아남았다.
명동에서 맞은 전성기
한국전쟁이 끝나고 맹아기던 신발도 산업화에 접어든다. 서대문 사거리 부근에서 창업한 K 제화가 1954년 기성화 시대를 연다. 1961년 명동에서 창업한 E 회사는 1966년 수제화 자동화 공정을 도입함으로써 소비자가 원하는 대로 디자이너가 직접 제작하는 살롱화 시대를 연다.
1960년대 축적된 자본으로 1970년대 초고속 성장의 산업화 시대를 연다. 늘어난 소득은 의식주를 충족했고, 잉여 산물은 다른 생활을 변화시켜나갔다. 신발도 예외가 아니었다.
▲ 1976년 명동 최고 상권을 구가하던 1976년 명동 코스모스 백화점 근처 모습. 보행자로 꽉찬 도로 가에 신발 등의 간판이 보임. |
ⓒ 서울역사박물관 |
1970년대 명동은 당시 유행을 선도했다. 일제 강점기 형성된 금융과 소비재 등 중심상권에 더하여 옷과 신발, 미용이 결합한 형태였다. 최고로 비싸다는 땅값과 함께 백화점, 맞춤옷의 양복점과 양장점, 최고급 신발 가게가 공간을 지배한다. 테일러와 유명 여성복매장이 화려한 쇼윈도로 지나는 젊은 남녀를 유혹한다. 말 그대로 패션 1번지였다.
패션의 완성은 구두다. 멋과 유행을 따르려는 젊은 숙녀와 신사는 명동을 중심으로 유통되는 최고급 살롱화에 열광했다. 이런 경향이 한세대를 이어왔으나, 1980년대 후반 밀려온 값싼 기성화 파고를 넘어서진 못했다. 1990년대 후반 청담동 등으로 유행과 패션 주도권을 넘겨주면서 패션 1번지라는 명동의 명성마저 저물어 갔다.
낡아 해어진
성수동은 지금 낡아 해어진 구두를 닮아있다. 여러 번의 시련이 이 공간을 흔들어 댔다. 그때마다 꿋꿋한 장인정신과 동류의식으로 뭉치고 견뎌냈다. 그러함에도 빛나던 화양연화는 황혼처럼 저물고,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낡고 해어진 흔적만 남아 흔들리고 있다.
변화와 시류에 적응하지 못해서였을까. 난마처럼 얽혔으나, 낮은 공임 몇백 원 인상에 산사태처럼 무너져내리는 취약한 산업생태계의 구조적 문제일까. 그도 아니면 최종 납품가의 5∼6배수에 책정되는 구두 가격을 놓고, 원청 기업이나 백화점 등 상위포식자들이 승냥이처럼 찢어발겨 생겨난 현상일까.
카페와 인쇄, 사무공간 등 다른 업종에 자리를 내어주고 점점 야위어 가는 성수동 수제화 거리는 그러나 말이 없다. 마지막 잎새라도 지켜내려 몸부림치는 장인의 망치질 소리와는 달리, 수제화 거리엔 겨울로 접어드는 스산한 바람만 불어온다.
▲ 수제화 제작 공간 전면 도로에 면한 곳은 매장으로, 안쪽은 지하와 1층 및 2층에서 피혁 및 수제화 공방 등으로 운영되고 있는 전형적인 성수동 수제화 제작 공간의 모습. |
ⓒ 이영천 |
1970년대부터 생겨난 성수동 수제화는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 최전성기를 맞는다. 이 공간을 발판삼아 번성하다 명멸해간 제화기업이 부지기수고, 그런 현상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렇듯 신발 기업이 수십 년간 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음에도, 자기들 발판인 이곳에 건강한 산업생태계를 구축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몇 년 전에 벌어진 공임 1300원 인상에 수백 개 기업이 줄도산한 사례가 이를 극명하게 증명하고 있다.
천이하는 성수동
▲ 성수동 카페 거리 옛 공장을 카페로 사용 중인 오른쪽의 '대림창고' 건물을 위시하여 공간 천이가 빠르게 이뤄지고 있는 성수동 카페 거리. |
ⓒ 이영천 |
늘어난 업무공간이 이제는 지대를 높이는 요인으로 작동하면서, 여러 기능이 혼합된 공간 천이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수제화 공간이 살아남으려는 몸부림과 변신만으로 버텨낼 수 없는 기재가 작동하는 셈이다. 높아진 임대료와 거세진 개발압력이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 업무공간 서울 지하철 2호선 성수역 남쪽 '성수동 구두 테마공원' 동측 공간을 빠르게 점령하고 있는 대규모 업무 및 사무, 주거공간. |
ⓒ 이영천 |
이렇다 할 우세종은 아직 없으나, 수제화가 지배하는 공간은 아니라는 점만은 명확해 보인다. 뭐가 될지는 몰라도 수제화 아닌 다른 기능이 공간을 지배할 것이란 예상은 그래서 필연으로 보인다. 앞으로 열세종으로 변한다면, 수제화는 어떤 방식으로 생존해 나갈까?
사라져 가는 모든 것이 아쉽고 안타깝다. 성수동 수제화 거리는 물론 수제화도 어쩌면 박물관에서나 만날 수 있게 될지 모른다. 도시 공간구조 변화를 인위적으로 조종할 수는 없어도, 정책과 힘을 모으는 노력으로 최소만이라도 유지할 수는 있다.
기성화가 아닌 내 발에 꼭 맞는 수제화를 신어야 몸이 편안한 것처럼, 사라져 가는 도시공간을 보존하려는 노력은 잊히고 있는 우리를 다시 찾는 여정이란 생각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촛불 집회에서 "국민의힘에 박수" 요청, 왜?
- '완벽한 김치' 위해 배추밭 찾았지만... 식당의 꿈을 접다
- 버려진 휴대폰에 녹음된 총성... 몰래 나무 베다 딱 걸렸다
- 이태원참사 희생자 호명한 문소리, 돌발 발언이 아닌 이유
- 제자들을 사지로 내몬 교장... 그가 울면서 한 말
- 겉과 속이 다른 호떡집, 이것 땜에 섬에서 배 타고 온대요
- 새 키우는 알바 지원했는데... 닭을 죽이는 일이랍니다
- <주간함양>, 2022 오마이뉴스 우수제휴사 선정
- 이게 힘들 줄이야... 일회용품 끊기 챌린지의 가장 큰 고비
- 크리스마스 때 17만명 오간 신촌역... 서대문구 "안전계획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