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면 '대재앙의 문'은 다시 열린다…참사 기억하는 日애니 [도쿄B화]

이영희 2022. 11. 2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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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희의 [도쿄B화]

「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너무 다른 일본. [도쿄B화]는 사건사고ㆍ문화콘텐트 등 색다른 렌즈로 일본의 뒷모습을 비추어보는 중앙일보 도쿄특파원의 연재물입니다.

이제는 아무도 찾지 않는 시골 마을의 폐교, 오래 전 운동장으로 사용됐을 황량한 공간에 하얀 문이 서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도라에몽'에 나오는 '어디로든 문' 같은 희망의 문이 아닌, 많은 이의 생명을 위협하는 지진을 부르는 '대재앙의 문'입니다. 지난 21일 일본에서 개봉한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すずめの戸締まり)'은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이 문을 닫는 임무에 뛰어든 소녀 스즈메의 이야기입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스즈메의 문단속' 스틸컷. 사진 토호시네마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 스틸컷. 사진 토호시네마


'너의 이름은'(2016) '날씨의 아이'(2019) 등으로 한국에도 많은 팬을 지닌 신카이 마코토(新海誠) 감독의 신작인 이 작품은 개봉 2주 만에 전작이 세운 기록들을 갈아치우며 흥행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빛의 마술사'로 불리는 감독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화면과 매력적인 캐릭터, 스릴 넘치는 전개, 최고의 음악이 어우러진 걸작이란 찬사도 쏟아집니다.


"잊혀지면 안되는 것을 그렸다"


아마도 이 작품이 일본인의 마음을 제대로 건드리는 건 지진이라는 재해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과 절망, 그럼에도 희망을 찾아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신카이 감독은 '너의 이름은'에서 수백 년 만에 떨어진 혜성으로 궤멸적 피해를 입은 마을, '날씨의 아이'에선 끊임없이 비가 내리는 도시 등 재난을 마주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죠.
2017년 2월 '너의 이름은' 한국 개봉을 맞아 내한해 영화를 설명하고 있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 [중앙포토]


이번 영화에선 보다 직접적으로 2011년 3월 11일에 일어났던 '동일본대지진'을 언급합니다. 재난의 문을 닫으려는 스즈메의 여정은 규슈(九州)에서 출발해 고베(神戸)와 도쿄(東京)를 거쳐 3·11의 그 곳 미야기(宮城)로 이어집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지역들이 일본 역사에 남은 대지진 참사를 겪었던 곳들인 것은 우연이 아닐 테죠.

신카이 감독은 일본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지난 10년 간 계속 동일본대지진을 생각하며 작품을 만들어왔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영화는 "수많은 사람의 삶을 바꿔 놨던 사건이 잊혀져 간다는 것,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시작됐다고 했죠. 사람들의 발길이 멀어진 폐허에서 재난의 문이 열린다는 설정은 지나간 비극을 어느새 잊고 마는 우리의 현실에 대한 메타포로 읽힙니다.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의 스틸컷. 사진 미디어캐슬
신카이 감독이 2019년 만든 애니메이션 '날씨의 아이' 스틸컷. 사진 미디어캐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 아직도 4만명


다수의 기억에선 희미해지고 있지만 어떤 이들에게 11년 전의 참사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동일본대지진으로 인한 사망자와 실종자는 2만여명에 달했고, 재해로 엄마나 아빠를 잃은 아이들이 1200여명, 부모를 모두 잃은 아이들도 200명이 넘었습니다. 재해 지역에 살던 47만 명이 집을 떠나 피난을 갔고 10년 후인 2021년까지도 돌아가지 못하고 타지에 정착해 살아가는 사람이 4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전국으로 흩어진 사람들, 특히 아이들은 재해지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죠. 이젠 뉴스에도 등장하지 않는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지난 10년을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또다시 찾아올 참사를 막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없을까요. 비극을 딛고 살아간다는 것, 무력한 줄 알면서도 싸운다는 것의 의미를 영화는 곱씹게 합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 스틸컷. 사진 토호시네마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 스틸컷. 사진 토호시네마


'스즈메의 문단속' 공식 사이트 첫 화면에는 '관람 예정인 분들께'라는 제목의 안내문이 적혀 있습니다. "본 작품에는 지진 사진 또는 긴급지진속보를 수신할 때의 경보음이 흘러나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실제 경보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만, 관람 전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일본에서 살면서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은 예기치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지진경보음이 울릴 때일 겁니다. 그러니 영화에서 나오는 경보음에 놀라지 마시라 미리 주의를 당부하는 겁니다.

참사를 정면으로 다뤘지만 '스즈메의 문단속'은 어둡지 않습니다. 스즈메의 모험담은 두근두근, 흥미진진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해 "많은 이들이 희생 당한 사건을 판타지의 소재로 삼아 엔터테인먼트화하다니!" 비판도 나옵니다. 이런 반응에 감독은 답했습니다. "재해를 엔터테인먼트화했다는 이유로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비극을 당한 누군가가 10년을 지나 성장했다는 것, 제대로 웃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상처가 구원이 되는 모습을 그려내는 것은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면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도쿄=이영희 특파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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